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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호에서 플로깅
향호에서 플로깅 ⓒ 이준수

자연을 사랑하는 적극적인 방법 중 하나는 플로깅이다. 플로깅은 산책하면서 쓰레기를 줍는 행위를 말한다. 어떤 사람은 '쓰담 산책'이라고도 부른다. 우리 가족은 플로깅을 좋아한다. 우리가 사는 강릉에는 황홀한 자연을 배경으로 플로깅 할 수 있는 장소가 무척 많다.

2주 전 경포호 플로깅에 이어, 이번 주말은 향호로 향했다. 경포호가 강릉의 중간 권역에 있는 호수라면, 향호는 주문진 앞바다에 면해 있는 북강릉 호수다. 향호는 안목해변이나 강문 해변에 비해 사람들의 관심도가 떨어지는 곳이었다. 그런데 BTS가 향호 해변 버스정류장에서 'YOU NEVER WALK ALONE' 앨범 재킷을 찍으면서 굉장히 뜨거운 공간이 되었다.

걷지 않는 호숫가 향호

개인적으로 특이하다고 생각했던 건 버스정류장에 사진 찍으러 가는 사람은 있어도, 향호를 걸어봤다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향호 좋아?"
"버스정류장이랑 해변에 캠핑족들만 붐벼. 호수는 몰라."


향호 해변은 향호라는 호수의 이름을 빌려와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호수는 외면당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무척 끌렸다. 걷지 않는 호숫가라니. 적어도 삼십 대에 걸쳐있는 내 주변 또래들은 아무도 호숫가를 걸어본 사람이 없었다. 엄청 더럽거나 전혀 관리가 되지 않는 것인가, 하는 불안한 상상을 하며 차를 몰았다.

자본과 축제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경포와 달리 향호로 난 길은 소박했다. 우리는 해변 쪽 주차장에 차를 대지 않고, 논 사이로 난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꼬불꼬불 들어갔다. 창밖에서는 왜가리가 논에 대가리를 박고 부리를 우물거리고 있었다. 강릉에 그 흔한 카페도 하나, 그리고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또 하나뿐이었다.

향호는 한가롭고 소탈한 해안가 농촌 마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논에 물을 대고, 망중한에 낚싯대를 드리우는 여유로움이 물가를 감싸고 있었다. SNS에 짜잔 하고 부러움을 살 만한 사진을 남길 수 있는 핫플레이스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편안한 시골의 정취가 매력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미개발지로 어수선하게 방치된 것은 아니었다. 호수 주위로 산책용 데크가 깔려있고, 농경지도 부지런한 농부의 손길로 관리되고 있었다. 쓰레기를 줍는 동안 버스 차고지에 버스를 대놓고 잠깐 걷는 기사님, 낚싯대를 여섯 개씩 꽂아두고 졸고 있는 할아버지 같은 분들과 드문드문 마주쳤다.
 
 향호에서 플로깅
향호에서 플로깅 ⓒ 이준수

향호 발견한 쓰레기는 크게 두 종류였다. 담배꽁초, 빵 봉지, 커피 캔 따위의 생활용품과 농약 콩, 밭이랑에 덮는 비닐을 포함한 농업 관련 폐기물. 방문객이 적다고 해서 쓰레기가 적지는 않았다. 그리 크지 않은 호수를 한 바퀴를 도는 내내 쉴 새 없이 집게질을 해야 했다.

어째서 이렇게 규칙적으로 골고루 쓰레기가 분포하는 걸까. 일정 간격으로 쓰레기가 보이지 않으면 불안한 강박증을 가진 사람이라도 있는 것일까. 끝도 없이 나오는 담배꽁초를 담으며 이것을 뱉어낸 주인의 입으로 다시 넣고 싶다는 끔찍한 상상이 자주 들었다.

부정적인 감정이 강하게 올라오면 심신의 안정을 취하기 위하여 호숫가 위로 몸을 날리는 물고기를 구경했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물고기는 거의 자기 몸통 길이만큼 튀어 올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물고기가 담배 필터에서 분해된 미세 플라스틱을 먹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쓰레기는 세계 곳곳에 스며들고 있었다.

호수 한 바퀴만에 20L 쓰레기봉투 가득 차
 
 향호의 모습
향호의 모습 ⓒ 이준수

데크 아래에 떨어진(혹은 일부러 버린) 테이크아웃 커피 용기도 흔했다. 봄 가뭄에 수위가 대폭 낮아져 있어, 나는 자주 아래로 내려가 주웠다. 본래 물이 찰방거려야 할 곳에는 진흙 펄에 가까운 모습이 되어 수초가 높게 자라 있었다. 며칠 전 비가 제법 내렸는데도 이정도니, 지난달에는 심각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보령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뉴스를 읽었다. 집 소파에서 뉴스를 읽을 때는 도대체 왜들 그러시나 하고 생각했지만, 논두렁 옆에서 새파란 모를 바라보며 다시 생각하니 오죽했으면 그랬겠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농사를 짓는 곳에서 두 발로 직접 서보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감정도 있었다.

쓰레기를 줍는 동안 많은 분과 마주쳤다. '어디서 오셨냐?' 그리고 '좋은 일 하신다'는 덕담을 건네셨다. 차림새나 인사말로 보아 관광객보다는 인근 주민분들인 것 같았다. 향호리도 행정구역상 강릉시에 포함되어 있으나, 우리가 OO동에서 왔다고 하자 강릉에서 예(여기)까지 쓰레기를 주우러 왔다고 기뻐하셨다. 주문진 근방의 주민들은 강릉 시내 권역과 다른 땅에 살고 있다는 감각을 지니고 계신 듯했다.

예전에 삼척에서도 아이들과 쓰레기를 주울 때 도계읍 분들은 본인을 삼척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도계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이것이 시골 지역의 정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도시 사람들은 어떨지 문득 궁금했다. 정말 강남에 살면, 서울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강남 사람이라고 할까. 서울에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나는 결코 답을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호수를 한 바퀴 다 돌 무렵 이십 리터 쓰레기 종량제 봉투가 가득 찼다. 냄새가 심하고, 공벌레와 날벌레들이 플라스틱 용기 사이사이를 돌아다녔다. 집에 가기 전에 BTS 버스정류장에나 들러볼까 잠깐 고민했지만 너무 피곤했다.

차 안에서 BTS의 'YOU NEVER WALK ALONE' 앨범에 수록된 '봄날'을 들었다. 쓰레기를 줍는 걸 두고 여러 번 격려해 주셨던 주민분이 떠올랐다. 향호 플로깅은 혼자 걷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BTS 앨범 제목처럼 다음번에는 플로깅 하는 분들을 만날 수 있다면 무척 반가울 것 같다.

#향호#플로깅#강릉#쓰담산책#쓰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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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구하는 가계부, 미래의창 2024>, <선생님의 보글보글, 산지니 2021> 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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