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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5부정선거'에 맞선 학생들의 시위 장면
'3·15부정선거'에 맞선 학생들의 시위 장면 ⓒ 마산MBC
 
김지하는 서울로 유학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1956년 1차로 서울에 있는 배제고등학교를 지원했으나 낙방하고 2차로 중동고등학교에 합격하였다.

이 시기 한국은 이승만 독재의 절정기였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가 유세길에 뇌일혈로 급서하고, 5월 15일 실시된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은 자유당 이승만이, 부통령은 민주당 장면이 각각 당선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3선을 금지한 헌법을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변개하고 관권부정 선거를 통해 장기집권에 나섰다. 8월에 실시된 도의원선거 역시 부정으로 시종되었다. 9월에는 장면 부통령이 자유당의 공작으로 피격되었으나 용케 살아남았다. 

김지하는 고등학교 3년 동안 서울에 넘쳐 흐르는 외국문화의 흡수에 몰두하여 모더니즘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것을 쫓아다니다 오든, 스티븐 스펜서, 루이 맥리스, C. D. 루이스, 딜런 토머스 등의 시를 외국어로 읽고 그 중 딜런 토머스에게 가장 매료된다. 그런 한편 한 여선생이 준 서정시집을 계기로 김소월, 김영랑, 서정주 등의 시를 외우고 다니며 '미치기 시작'하고, 시작(詩作)에도 손을 대다. 

중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미학과에 입학하다(4.19 후 미학과가 문리대로 옮겨지는 바람에 문리대 학생이 되다). 서울대학에 입학한 후 1년 동안에 여러 뛰어난 친구들과 사귀고, 부패한 현실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다. 어린 시절부터 체험적으로 느껴왔던 역사적 불행에 대한 분노가 구체화되기 시작하다. 학문에 대한 관심보다 민중의 수난에 대한 관심이 더 크게 그를 사로잡기 시작하다. (주석 1)

이승만의 권력욕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1960년 3.15 부정선거를 자행하고 학생들 시민들이 이를 규탄하는 시위에 나섰다. 김지하도 다니던 서울대 문리대생들의 시위에 앞장섰다. 4.19 혁명이다. 2학년 때였다. 신병으로 휴학했다가 9월에 복학했다. 11월에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이 발족되고, 여기에 참여하여 열심히 활동한다.

5월 4일,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이 남북학생회담을 제안한다. 5월 5일, '민족통일 전국학생연맹 결성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5월 13일, 오천여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참가한 가운데 '남북학생회담환영민족통일 궐기대회'가 서울에서 열리고, 참가한 사람들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등의 슬로건을 들고 시가를 행진한다. 학생들이 주도한 이같은 일련의 민족통일 촉진운동에서 김지하는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고, 남북학생회담의 남쪽 대표 3인 중 한 사람으로 내정되다.

5월 16일, 박정희의 군사쿠데타에 의해 민주당 정권이 붕괴되다. 통일운동에 주도적으로 참가한 학생들이 지명수배됨에 따라 김지하는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 근처 해남으로 도피해서 항만 인부생활을 하며 군사정권을 타도할 수 있는 혁명을 꿈꾸다. 마음은 끊임없이 서울로 향하고 가슴은 현실에 대한 피 끓는 노여움으로 꽉 차있어 '하루도 술 없이는 잠들 수 없었'던 나날을 계속하다. 폐결핵이 육체를 좀먹기 시작하다. 9월에 두 번째로 휴학하다. (주석 2)
 
1939년 만주행을 통해 군인으로 변신한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1년 5·16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 1939년 만주행을 통해 군인으로 변신한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1년 5·16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
1939년 만주행을 통해 군인으로 변신한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1년 5·16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1939년 만주행을 통해 군인으로 변신한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1년 5·16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 ⓒ 박정희 인터넷기념관
 

김지하는 20세가 되기까지 일제식민지→해방→6.25전쟁→이승만 폭정→4.19혁명→박정희 군사쿠데타를 겪은 것이다. 식생활이 부실하여 폐결핵에 걸리고, 이같은 복합적인 상황은 그의 저항의식을 싹틔우는 요인이 되었다. 1963년 3월에 복학했을 때는 대학가에 군정반대 시위가 일어나고 정국이 소연한 가운데 박정희는 '민정이양'의 공약을 저버린 채 민간복으로 갈아입고 대통령이 되었다.

김지하는 이 시기 <목포문학> 제2호에 처녀작 <저녁 이야기> 시 한 편을 김지하(金之夏)라는 이름으로 발표하고, 조동일ㆍ심우성 등이 주도한 '우리문화연구회'와 하길종 등이 관계한 영화연구반(시네클럽), 연극반 등에서 활동한다. "후에 담시(譚詩)의 바탕이 될 판소리, 탈춤 등의 전통문화에 대한 소양을 얻다. 친구들과의 토론, 대화, 독서 등을 통해 현실을 이해하는 시각을 다지다. 이 시기까지는 극단적인 형태실험의 시에서부터 <황톳길> <산정리 일기> 등의 민중적인 서정시에 이르기까지 여러 경향의 시들을 쓰는 생활이 계속되다." (주석 3)


주석
1> <작가세계>, 1989년 가을호, <김지하 특집>, '문학적 연대기', 23쪽, 세계사.(이후 <작가세계> 표기).
2> 앞의 책, 23~24쪽. 
3> 앞의 책, 24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인 김지하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김지하#시인김지하평전#김지하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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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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