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2004년 2월 2일, 미국 워싱턴D.C. 근교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 숲 속에 있는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5층 사진자료실. 나는 'Korean War'(코리안 워) 파일을 들추다가 전율했다. 그곳에는 우리나라 6.25 전쟁의 참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날 당시 난 여섯 살의 소년이었다. 그해 여름, 피란지 토굴에서 전투기 굉음과 폭격소리, 멀리서 가까이서 들려오는 대포소리와 기관총소리를 들으며 공포 속에 지냈다. 산길 들길에는 뽕나무 채반에 누에처럼 널브러진 시신들, 미 전투기들의 융단폭격으로 온전한 건물 하나 없이 폭삭 주저앉은 도시와 마을...
이런 장면들이 또렷하게 또는 희미하게 내 기억 속에 악몽처럼 남아 있는 바, NARA 수장 사진들을 보자 그때의 희미한 장면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새록새록 떠올랐다.
피란지 산야 아무데나 지천으로 흩어져 있던 시신더미들, 쌕쌕이(미 전투기)들이 염소 똥처럼 마구 쏟아 떨어뜨리는 포탄, 포화에 쫓겨 가재도구를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허겁지겁 뛰어가는 피난민 행렬, 배만 불룩한 아이가 길에 버려진 채 울고 있는 장면, 흥남부두에서 후퇴 수송선에 오르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는 피난민, 파괴된 대동강 철교 위로 꾸역꾸역 곡예 하듯 남하하는 피난민, 꽁꽁 언 한강을 괴나리봇짐을 진 건너는 피난민, 부산 영주동 일대의 판자촌, 수원역에서 남행 열차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피난민...
순간 나는 이 사진 이미지들을 모두 가져다가 6.25전쟁의 참상을 잘 모르는 세대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다행히 자료실에서 스캔이 허용되기에 동행한 재미동포 박유종(박은식 임시정부 대통령 막내손자) 선생의 도움을 받으며 수만 컷의 사진자료를 들춰 보면서 그 가운데 일부를 선별해 입수했다.
귀국 후 6월 25일 전쟁기념일에 맞춰 눈빛출판사가 <지울 수 없는 이미지>라는 사진집으로 펴냈다. 사진집이 나오자 언론들이 대서특필하고, 독자들의 성원도 매우 컸다. 나는 과분한 성원에 NARA에서 미처 들춰 보지 못한 사진들이 눈에 어른거려, 이후 제2차 (2005년 11월), 제3차(2007년 2월), 제4차(2017년 10월), 등 모두 세 차례나 더 미국에 가 총 80일가량 머물면서 2000여 점의 한국현대사(주로 6.25전쟁) 사진을 입수한 뒤 돌아왔다.
그리하여 이 가운데서 100여 장면을 선별하여 몸소 6.25전쟁을 겪은 원로 문인 김원일·문순태·이호철·전상국 선생의 생생한 체험담을 담아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을 펴냈다. 그러자 당시의 일들이 마치 비단 위에 꽃수를 놓은 것처럼 생생하게 보는 듯, 들리는 듯했다. 다음은 문인들이 당시의 체험담이다.
"인공치하 석 달을 서울에서 살며, 나는 후방의 전쟁 상황을 많이 목격했다. (1950년) 7월 중순부터 시작된 미군 비행기의 공습이 대단했다. 처음 한동안은 창공에 비행기가 뜨면 공습 사이렌이 길게 울렸으나, 비행기들이 서울 하늘을 점령하다시피 떠 있고 시도 때도 없이 폭격을 해대자 사이렌 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대여섯 대씩, 어떤 때는 열 대가 넘는 비행기들이 나타나 기총소사를 쏟아 붓고 포탄을 주르르 떨구곤 사라졌다. 서울은 차츰 잿더미로 변해갔다. 북한군이 남한 어디까지 해방시켰는지 지도까지 그려 넣은 뉴스 판이 거리 담벼락에 자주 바뀌어 붙어졌다. (중략)
8월에 접어들자 야간 공습이 특히 심했다. 어둠이 내리면 일체 불을 밝힐 수 없고, 창문을 가릴 수도 없었다. 저녁밥도 해지기 전에 지어서 먹어 치워야 했다. 밤에는 미군 정찰기가 서울 하늘을 점령했다. 민청에서 집집마다 나누어 준 스탈린과 김일성 초상화를 방 벽에 붙여놓아야 했는데, 밤에는 정찰기에서 내쏘는 탐조등 불빛이 그 초상화 위를 훑고 지나가는 것을 본 적도 있었다.
어느 날 밤, 가까이서 포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우리 집 함석지붕 위까지 날아온 돌조각이 쏟아졌는데, 이튿날 나가보니 있던 집은 간데없고 큰 웅덩이가 패어 있었다. 이웃사람들 말이, 그동안 징집을 피해 숨어있던 장정이 피란길에 나서기 전에 밥을 지어먹다 그 불빛이 비행기에 들켜 포탄을 맞았다고 했다.
피란 못 간 서울시민도 입에 풀칠은 해야 했다. 화원시장에 나가보면 사람 떼거리로 시골대목장을 방불케 했다. 집에 있는 온갖 것을 갖고 나와 난전을 펼쳐놓고 팔았다. 사람들은 양식과 푸성귀를 구하려 혈안이 되었다. 청계천 쪽으로 나갔다가 청계천 바닥에 걸레처럼 던져져 있는 시체도 숱하게 목격했다.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이었던 때인지라 옆집 사람이 폭격을 맞고 죽어도 그러려니 했지 놀라지 않았다." - 김원일 '서울에서 겪은 인공치하 석 달'
"백아산까지 가는 동안 나는 너무 많은 시체들을 보았다. (중략) 개울가나 길가의 풀숲, 후미진 숲정이마다 시체가 있었다. 마을 어귀의 텃밭에도, 산자락으로 올라가는 밭이나 흙구덩이와 대밭에도 어김없이 시체가 썩고 있었다. 한번은 연기가 나지 않는 싸리나무를 꺾으러 갔다가 소나무에 등을 기댄 채 빳빳하게 앉아 있는 시체를 보고 질겁한 적이 있었다. 그 후 백아산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도 나는 많은 주검을 목격했다. (중략)
개나리가 지고 북쪽 산에 진달래가 불길처럼 타오른 1951년 4월이었다. 소문대로 토벌작전이 시작되었다. 토벌대는 새벽부터 사방에서 백아산을 포위해 왔다. 외곽을 지키고 있던 유격대들이 속속 패퇴하여 백아산으로 들어왔다. 마을에 있던 우리 가족도 다른 피란민들과 함께 새벽에 문재를 넘어온 토벌대를 피해 백아산 깊숙이 들어갔다. 산 아래서는 토벌대가 계속 우리를 추격해 왔다. 사방에서 총탄이 날아왔다. 우리는 가시덤불을 뚫고 계속 도망쳤다.
(중략) 백아산을 찾아갔던 20여 호의 우리 마을 사람들 중에 살아서 나온 사람은 여남은 명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요즈막 백아산에 자주 간다. 백아산 골짜기마다 6.25의 영혼들이 떠도는 것을 느낄 수 있다." - 문순태 '골짜기마다 떠도는 고혼들'
* 다음 기사
전쟁 한복판 늙은 병사의 탄식 "아들이... 우리집 우짜노" 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동북아역사재단뉴스> 6월호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