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건축을 전공한 '랄라'에게 전북 남원은 생활의 근거지이자 핵심 연구 주제였다. 사람들을 만나면 남원이라는 도시의 매력에 관해 이야기하곤 했다. "남원, 이런 점 진짜 좋지 않아?" 그럴 때 "맞아,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맞장구를 치던 사람들이 있었다.
랄라는 그런 사람들을 모아 같이 공부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고, 지금 그들은 '도공디공회'라는 모임으로 꾸준히 만나서 '도시','공간', '공공디자인'에 대해 탐구해나가고 있다. 4년 차에 접어든 '도공디공회'의 '랄라'와 '윤경'을 만나 모임 이야기를 들어봤다.
도시·공간·공공디자인 공부하는 사람들
처음엔 둘이었다. 2018년, 남원에서 '알아가는 책 가게'(현재는 운영하지 않음)를 운영하던 '아라'와 건축공간연구소를 운영하던 '랄라'가 남원 구도심을 걸으며 이야기 나누던 것을 2019년에 접어들며 공부 모임으로 열고 '도공디공회'라는 이름을 붙여 사람들을 모집했다. 전주에 사는 윤경도 인스타그램으로 소식을 듣고 모임에 합류했다. 중간중간 멤버가 바뀌긴 했지만, 이 세 사람이 초창기부터 꾸준히 모임을 이어오고 있는 원년 멤버다. 윤경이 도공도시에 참여하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저는 원래 그림을 전공했어요. 그래서 예술마을이라는 곳에 작업실을 얻게 됐어요. 근데 그 마을이 도시재생 사업에 선정됐더라고요. '도시재생'이 뭔지 궁금해서 검색하다가 우연히 '도공디공'을 봤어요. 포스터에 쓰인 말 도시, 공간, 공공디자인 중에 저하고 관련 있는 단어는 한 단어도 없었어요. 그런데도 이게 무엇을 공부하는 것인지 궁금하더라고요."
도공디공회는 첫해에 도시와 건축에 대한 책 함께 읽기, 공간을 관찰하고 그려보기, 논문이나 보고서를 살펴보며 사례 탐구하기, 건축이나 공간 관련 다큐멘터리 함께 보고 토론하기, 머물고 싶은 공간(모형) 만들기 같이 다양한 방식으로 공부를 쌓았다. 낯선 주제지만 지루하지 않게 짜인 알짜배기 커리큘럼 덕분에 참여자들의 만족도가 높았다.
"처음에 어렵고 전공 서적 같은 책들을 읽었어요. 그래도 지식이 생기니까 너무 좋았어요. 그런 책을 접할 기회가 없잖아요. 흥미로운 경험이었어요. 실제로 도시재생 하는 지역에 살고 있으니까 도움이 많이 됐고요. (도시재생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나름대로는 생각이 자리 잡게 됐어요.
제가 만난 사람들 대부분은 도시재생을 도시개발로 생각하시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아주 좋은 관광지를 만드는 사업이라고 받아들이시는 분들도 많았고요. 내가 도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질지, 나는 그 공간이나 지역에서 무엇을 해야 주변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을지 이런 고민을 하게 되는 모임이라서 지금까지 오게 되는 것 같아요."
처음엔 가벼운 호기심으로 모임에 왔다는 윤경, 차로 한 시간을 와야 하지만 지금은 남원에 오는 길이 마냥 즐겁다고 했다. 윤경에게 남원은 어떤 느낌인지 물었더니 남원에 정이 푹 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남원이 상당히 정적인 도시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관광지로 좀 알려지긴 했었지만, 상당히 고요한 곳 같았어요. 재미있는 지점은 고요한데 뭔가 이야깃거리가 참 많더라고요. 소도시이다 보니 이동도 편하고,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어디든 갈 수 있는 것도 되게 매력 있었어요. 그래서 남원이 되게 따뜻하고 정감있게 느껴지더라고요. 작다고요? 네, 작죠. 그런데 그게 또 남원의 매력이에요. 전주도 한적했었는데 요즘은 많이 복잡해지고 시끌시끌해졌거든요."
남원 생활
윤경이 이야기하는 동안, 랄라는 그동안 모임에서 함께 읽은 책이라며 한 보따리를 꺼내와 내려놓았다. 모임의 시작 단계에서 함께 읽었다는 책은 도시계획의 고전이라는 <아테네 헌장>과 현재 한국 사회를 건축적으로 조망했다는 <넥스토피아>. 전공자가 아니면 쉽게 집어 들 리는 없을 것 같은 표지였지만, 잠시 들춰보니 공간과 도시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해 보였다. 한 권 한 권을 소개하는 랄라의 눈빛과 열정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만했다.
"저는 대학원에서 도시건축을 전공했고 2학년 때 프로젝트 사이트를 '남원구도심'으로 정하고 살펴봤어요. 걸어 다닐 수 있는 도시의 몇 가지 조건이 있는데, 남원 구도심이 그런 조건의 도시구조로 되어 있어요. 남원은 도시생활권을 잘 형성할 수 있는 규모이기도 하고, 커뮤니티를 형성하기도 적당한 도시인데 그런 것들이 무시되고, 그냥 행정이나 예산 그런 것들에 의해서만 아무런 특색 없이 개발돼 버리는 게 안타까웠어요.
대도시가 아니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변화되지 않는 것이 남원의 좋은 점이기도 하지만, 도시나 공공디자인 등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문제예요. 서울에는 '도시공간개선단'이 있어 전문가들이 어떻게 도시를 만들어 나갈지 활발히 의논하고, 인구 10만의 영주시도 '도시건축관리단'을 구성하고 공공건축에 대해 고민해요.
남원에서 전문가들의 연구나 활발한 논의를 기대하긴 어려운 것 같고, 그래도 관심 있는 시민들이 함께 공부하고 시민들이 살고 싶은 도시에 대한 그림이라도 그려볼 수 있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남원이 가진 좋은 구조와 조건들을 지키면서 남원의 매력을 살릴 수 있으면 좋겠고요. 그래서 이런 모임을 만들어 본 거죠."
랄라에게 질문 하나를 던지니 그 다음 질문에 대한 답까지 줄줄 쏟아져 나왔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 것 같다며 머쓱해 하면서도 하나라도 더 얘기해주고 싶어 하는 그 심정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진짜 좋아하는 일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누구나 그러니까.
"처음에 남원에 왔을 때 건축하는 분들에게 남원에 대해서 여쭤보기도 했는데 대부분 개발이 되지 않은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하셔요. '구 남원역에 아파트가 들어섰어야 했다.', '높이 제한을 풀어야 했다.' 하고요. 그런데 이 도시의 장점에 관해서 이야기하시는 분들은 없었어요. 그게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제가 본 남원의 매력과 장점들을 공유하고 싶어요. 도공디공회에서 만들어지는 것들에 대해서도 계속 시민들과 더 공유하고 싶고, 그걸 늘 목표로 하고는 있어요."
도공디공회의 계획
"시내 다니면 할머니들이 정말 자전거 많이 타고 다니시거든요. 그러니까 남원 구도심이 걷기 좋은 이유가 우선 다 평지예요. 그리고 여기가 차가 없던 시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계획 도시기 때문에 보행에 편한 도시블록을 만들었고 그게 계속 유지된 거죠. 그런 남원의 구조 특성을 함께 살펴보고, 남원은 어떤 도시이고, 어떤 도시이면 좋을지 생각들을 모아갔어요."
랄라의 말처럼 도공디공회는 지난 2019년 모임을 진행하면서 걷기 좋은 도시와 자전거 타기 좋은 환경을 고민했다. 지난 2020년에는 '남원씨클로'라는 활동을 기획했다. 강사를 초청해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남원 구도심을 직접 걸어 다니며 자전거 환경을 관찰하며 남원에 적용할 수 있는 도시계획 방법들을 탐구했다.
지난해에는 자전거 이동만으로 생활이 가능한 도시, '자세권'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며 '남원시 자전거 정책 제안서'를 완성했고, 틈틈이 남원이 아닌 다른 도시들을 탐방하기도 했다.
그리고 올해는 '자세권과 공공도서관'을 주제로 잡아, 전국 곳곳의 공공도서관을 탐방하기로 했다. 어떤 도서관이 동네 사람들을 더 연결해주는지, 내가 사는 지역에 어떤 도서관이 필요한지 공부할 예정이다. 랄라는 도서관이 병원, 학교처럼 도시에 필요한 공공재라고 설명했다.
"'자세권'이 형성되려면 교통 환경도 잘 되어있어야 하지만, 자전거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지역 안에 내가 일상적으로 누릴 수 있는 어떤 공공 공간들이 다 포함돼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병원이나 학교 같은 거요. 그런 시설로 저희는 도서관이 필요하다고 본 거예요. 그래서 저희가 공부한 것들을 바탕으로 주제를 구체화하면서 확장해나가고 있는 거죠. 남원이라는 도시의 조건 안에서 가장 필요한 공공 인프라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공공도서관과 관련된 자료를 보다가 알게 된 것도 있어요. 도서관법 제7조는 '도서관은 국민이 신체적·지역적‧경제적‧사회적 여건에 관계없이 공평한 도서관 서비스를 제공받는 데 필요한 모든 조치를 하여야 한다'고 명시했어요. 예를 들어 남원에는 다문화 가정이 많잖아요.
도서관이 이와 관련된 서비스들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거죠. 농촌 어르신들이 어떤 필요가 있을 때 도서관에 올 수 있게 하도록 노력해야 하고, 교육도 당연히 해야 하는 거예요. 이런 것들이 공공도서관의 역할이래요. 어떤 깨어 있는 사람이 기획해서 하는 게 아니라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게 원칙이라고 쓰여 있는 거예요. 그게 굉장히 놀라웠어요."
도공디공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
도공디공회의 활동과 공부는 남원 구도심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지만, 동시에 이 모임은 남원이라는 도시에 갖는 관심과 남원에 만들어가는 변화는 어떤 공간, 어떤 도시에도 국한되지 않는 중요한 메시지를 암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랄라가 도공디공회의 목표를 설명했다.
"예를 들면 요즘 생겨나는 혁신도시 같은 곳은 걸어 다니기 힘들어요. 그건 사람이 아니라 자동차의 속도에 맞춰서 만들어 놓은 도시이기 때문에 그래요. 근데 거기에 사는 분들이 걸어 다닐 수 있는 도시를 꿈꿀 수는 없잖아요. 남원에서도 면 단위의 산내면 같은 곳은 걸어서 모든 걸 해결하게 하기 위해서 병원도 터미널도 백화점도 다 갖다 놓을 수는 없는 거잖아요. 뭐든지 자기가 사는 지역에 맞춰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거거든요.
저는 남원에 살고 있으니까 남원에 관심을 갖는 것일 테고, 누구든 '내가 사는 지역'을 생각할 때 필요한 도시의 모습은 다 다를 거예요. 중요한 건 '어떤 도시가 이상적이거나 좋은 도시다'라고 규정하려는 건 아니라는 거에요. 나에게 필요한 도시는 어떤 모습인지를 모든 시민이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생각해봐야 한다는 인식이 중요한 것 같아요.
도시가 누군가에 의해서, 무언가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고 우리는 계속 살잖아요. 근데 시민이 도시의 주인이 되게 하려면, 일반 시민들도 자신이 사는 장소와 도시에 관심을 두고, '내가 사는 곳이 이랬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해야 해요. 그게 도공디공회의 제일 큰 목표예요."
이런 시민들이 이미 존재하는 것, 그리고 계속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목표의 반쯤은 달성한 것 아닐까. 차곡차곡 쌓아온 공부의 시간은 윤경과 랄라의 일상과 주변에도 많은 변화를 불러왔다. 윤경이 경기 수원을 방문했을 때의 경험을 말했다.
"작년에 수원 행궁동에 답사갔을 때, 그 도시의 매력이 느껴지더라고요.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더라고요. 정말 공부가 헛되지 않았어요. 아이들한테도 이야기해줬죠. '엄마가 오늘 행궁동이라는 곳에 갔는데 수원시에서 이런 것들도 해주더라. 너무 부러웠어.' 하고요. 그럼 아이들이 '나도 가보고 싶어' 하기도 하고요. 그럴 때 공부가 더 재밌게 느껴져요."
윤경은 도공디공회 활동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어떤 '주변'을 만들어 줄 것인지 고민하고 상상하는 기쁨을 얻었다. 생각의 울타리도 자연스레 넓어졌다. 지역의 역사에 관심을 두게 되고, 주변 사람들과 앞으로는 어떤 역사를 만들어가야 할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윤경이 사는 지역에서 필요한 변화에 관해 주장할 때, 도공디공에서 쌓은 지식이 발휘되기도 한다.
모두의 공부
랄라는 이 모임 덕분에 공부를 지속해나갈 힘을 얻는다고 했다. 전공자들하고만 만나고 이야기 나누어오던 랄라가 낯설고 어려운 이 이야기를 어떻게 시민들과 쉽게 공유할 수 있을지는 계속 고민하는 중이다. 그러면서 공부의 깊이는 한층 더 깊어져 간다.
"건축 설계 일을 하고 있지만, 일하는 것과 공부하는 건 좀 다르잖아요. 시간을 내서 공부를 계속해야 발전이 있잖아요. 혼자서라면 아마 힘들었겠죠. 일과 관련된 것 아닌 이상은 공부하느라 시간을 쏟지 못했을 것 같아요. 비전공자들과 이야기하면서 제가 더 잘 아는 부분들을 풀어서 전달하는 역할을 하게 되니까 거기서 더 공부가 되기도 하고요. 쉽게 표현해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해야 더 쉽고 재미있게 설명할 수 있는지도 배워가는 것 같아요.
공공도서관 관련 기사에 이런 표현이 있었어요. '공공이란 어쩌면 다 함께 자연광을 쐬는 일일지도 모른다'고요. 누구에게나 다 밝게 비추는 햇빛 같은 그 햇빛이 비치지 않는 곳이 있으면 안 되는 그게 바로 공공이라는 거죠. 우리 사회와 우리 지역이 그렇게 공공 디자인하고 공공 인프라를 만들어가고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됐어요.
사실 도시는 누구의 것도 아니라 공공 이용을 전제로 해서 만들어져야 하거든요. 그런데 주로 돈 있는 누군가에 의해서만 만들어지고 돈 있는 사람들이 타는 자동차에 의해서만 구성되는 거예요. 누구나 쉽게 이동하거나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침해당하는 거죠. 그런 것들을 많이 살펴보고 이야기 나누고 있어요."
랄라와 윤경을 만나고 온 것만으로 이미 세상을 보는 눈이 한층 트인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는 것', '변할 수 없이 고정된 것'으로 보였던 우리 동네의 조각조각 풍경들이 이런저런 상상으로 일렁거렸다. 어쩌면 이미 정해진 것처럼 보이는 이 풍경들이 달라질 수도 있겠다, 이 동네에 산다는 것만으로 나에게도 지분이 있다, 변화를 꿈꿀 권리가 있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도공디공회의 첫 멤버이기도 했던 아라는 언젠가부터 서울에서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되어 서울에서 합류하고, 윤경은 전주에서 함께하고 있으며, 구례와 곡성에서도 모임을 찾아오는 이들이 생겼다. 어쩌다 전국모임이 된 셈이다. 이렇게 된 이상, 도공디공회의 영향이 전국 곳곳에 솔솔 퍼져나가 내가 사는 동네가 어떻게 생기면 좋을지 '한 목소리씩' 내는 시민들이 그렇지 않은 시민들보다 더 많아지기를 꿈꿔본다. 도공디공회의 공부 흔적은 웹사이트에 보기 쉽게 잘 기록되어 있으니 그 자취를 따라가며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이 재미난 공부를 시작해보는 건 또 어떨까.
* 도공디공회의 자세한 활동 기록은 도공디공회 홈페이지(https://sites.google.com/view/dogongdegong)를 참고하면 된다.
글 | 푸른
사진 | 임현택
기획/진행 | 누리
Author 푸른
내 이름도 별명도 살고 싶은 모습도 '푸른'. 나는 따뜻하거나 뜨거운 사람.
어린이의 벗 되어 살고 싶다. 어린이 해방을 꿈꾸며 산청에 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는 지리산권 지역에 필요한 작은 변화를 이끌어내는 사람들과 공익활동을 지원하고 있는 민간 지원단체로, 아름다운재단과 사회적협동조합 지리산이음이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리산권 지역에서 직접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 모임, 공간, 네트워크를 소개하는 글을 싣습니다. 이 인터뷰는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홈페이지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