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제국대학의 조센징>, 정종현 지음, 휴머니스트(2019)
<제국대학의 조센징>, 정종현 지음, 휴머니스트(2019) ⓒ 휴머니스트

지금은 이른바 '스카이(SKY)'로 뭉뚱그려지는 고려대나 연세대는 일제 강점기 땐 대학이 아닌 전문학교였다. 강제 병합 초기에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고등교육처럼 문명화된 지식인 양성 교육을 시행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식민지 운영에 필요한 정도의 인력 양성을 위해 초중등교육과 실업교육의 보급에 주력했다. 

이에 식민지 청년들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이들 중엔 이른바 '제국대학'에서 공부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제국대학은 1886년 도쿄제국대학을 위시하여 일제가 설립한 7곳의 관립 종합대학으로 근대 일본의 엘리트 육성 기관이었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과 대만에도 각각 경성제국대학(1924)과 대북제국대학(1928)을 세웠다. 

제국대학 유학생들의 집단 전기

'교토제국대학의 조선인 유학생 연구'를 시작한 저자는 일본의 7개 제대에서 유학한, 1천 명이 넘는 조선 학생에 주목했다. 그들은 제국 최고의 엘리트 집단의 일원이면서 동시에 멸시받는 '조센징'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고국으로 돌아가 한국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지울 수 없는 큰 영향"을 남겼다. 따라서 이 책은 저자의 말대로 이들 삶의 흔적을 추적한 '집단 전기'다. 

제국대학은 당시 일본 최고의 엘리트 집단으로, 국가 관료를 양성하는 수급처였다. 제국대학 졸업생만이 '학사'라는 타이틀을 독점했고, 최고의 학문 수준을 갖춘 교수들도 관료에 버금가는 대우와 사회적 존경을 받은 것 등은 국가가 직접 경영하는 대학이었기에 부여받은 특권이었다. 

이러한 지위의 제국대학에 조선인이 입학하는 것은 대단한 '영전'이었다. 유학생들은 제국대학에서 공부하고, 뒷날 식민지 총독부의 관료로 돌아와 '나리'로 대접받았지만, 정작 본토의 주요 공직자가 되기는 쉽지 않았다. 그것은 조선인 유학생들이 "제국 최고의 엘리트라는 자부심과 함께 식민지인으로서의 정체성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는 '원죄'였다. 

고문 시험 거쳐 군수와 판검사가 된 유학생들

도쿄제국대학과 교토제국대학의 졸업생 진로는 조선총독부와 만주국, 일본 본토의 (준)관료가 50~55%에 이르고 각종 관·공립 사립학교의 교원이 40% 정도였다. 1930년대 조선 사회는 도쿄제대 출신 엘리트마저도 구직난으로 고통받을 정도여서 관료는 가장 확실한 일자리로, 이들은 고등문관(고문) 시험을 거쳐 군수 혹은 판검사가 되었다. 

고등문관은 '관계(官界)의 꽃'으로 총독부 전체 관료 중 대략 10%에 불과했는데 그중 조선인은 극소수였다. 행정과 외교·사법과 나뉜 고문 시험 합격자는 제국대학 출신이 70%를 차지했다. 합격하여 식민지 관료가 된 제국대학 출신들은 자신의 출세를 고통을 겪는 식민지 동족을 구하려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합리화했다. 

그러나 이들은 동족에 대한 징용·징병·공출에 앞장서 조선 민중에게 직접적인 해악이었다. 경성제대 출신으로 경남 하동·창녕 군수를 지낸 법학자 이항녕이 자신의 과오를 여러 차례 고백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들은 또 만주로 진출하여 대륙 침략의 첨병이 되기도 했다. 

관료 중에서 사법관료는 특별한 존재였다. 사법과 합격자는 총독부의 철저한 신원조회를 통과하고 수습과정을 거쳐서 판·검사로 임용되는데 '사상이 깨끗'해야 했다. 그래서 판검사 경력이란 총독부가 보증한 친일파 증명이라고도 할 만했다.

그러나 도쿄제대 재학 중 고문 사법과와 행정과에 합격한 고병국은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관료 되기를 거부하고 대학원에서 공부하다가 귀국하여 변호사 개업을 했으나 이내 그만두고 연희전문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해방을 맞았다. 그는 서울대 법대의 초대 학장에 취임했고, 헌법제정 등 건국 초창기 입법에 이바지했다. 

관료들은 대부분 식민지 경력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그들이 축적한 사회자본은 다시 후손들의 사회적 신분으로 상속되었다. 저자는 제국대학과 식민지 관료라는 사회자본이 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보여주는 극적 사례로 한나라당 대선 후보였던 이회창을 든다. 

제국대학이라는 '사회자본', 지배 엘리트를 재생산하는 제도로 기능

백부는 교토제국대학 교수 이태규, 아버지는 총독부 검사서기를 거쳐 해방 후 검사를 지낸 이홍규, 외삼촌은 도쿄제대 출신으로 일본 군수성 관료를 지낸 김성용이었다. 외삼촌 3형제는 모두 국회의원을 지냈고, 장인 한성수는 고문 사법과에 합격하여 해방 후 대법관을 지냈고, 그 자신도 대법관을 역임했다. 지은이는 이회창을 "본가·외가·처가가 획득한 제국대학, 고등문관 시험, 식민지 관료라는 사회자본의 종합적 구현체"로 규정했다.

저자는 최초로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경성방직 사장이 된 김연수의 성취도 '제국대학'이라는 '사회자본'의 도움을 받은 경우로 본다. 그는 제국대학 네트워크의 도움을 받아 사업을 확장하면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전시체제기에 마침내 김연수는 "민족의 이익과 일본 제국의 이익 다르지 않다는 입장에 서게 됐다." 일제가 망하고 조국이 독립한 후에도 이들 가문의 자산은 줄지 않았다. 지은이는 뒷날, 김연수의 둘째 아들, 도쿄제국대학 출신의 김상협이 전두환 정부의 국무총리를 지낸 것은 제국대학이 "한국 사회의 지배 엘리트를 재생산하는 제도로도 기능"한 것으로 파악한다. 

제국의 지식으로 제국에 저항한 이들

제국대학 출신들이 모두가 양지만 좇으며 산 건 물론 아니었다. 교토제대 문학부를 다니던 송몽규는 1943년 외사촌 윤동주와 함께 체포되어 1945년 3월 스물아홉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이재유, 이관술과 함께 '조선공산당 경성재건그룹'에서 활동하다 체포되어 대전형무소에서 옥사한 박영출도 교토제대 경제학부 졸업생이었다. 

친일파 최남선의 막내아들 최한검은 도쿄제대 법학부를 나왔으나 공산주의에 기울어져 있었고, 해방 후 여운형의 근로인민당 중앙준비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좌익 진영에 가담했다. 여러 차례 투옥을 거듭하던 최한검은 한국전쟁 때 월북해 북한에서 활동했다. 
 
 교토대학교 법경 본관. 1933년에 준공했다.
교토대학교 법경 본관. 1933년에 준공했다. ⓒ 교토대학 누리집 화면 캡처
 
교토제대 법학부를 나온 한종건은 신간회에 가입하여 반일 활동을 하던 열정적인 투사였다. 그러나 1930년 귀국한 그는 총독부에 근무하며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여 전북 경찰부 경무과 경시를 시작으로 총독부 고위직 경찰로 살았다. 그는 여러 차례 일제의 포상을 받았고, 해방 후에는 경찰의 이인자까지 올랐다. 

일본의 제국대학과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한 조선인은 1천 수백 명이 넘지만, 조선인은 해방 때까지 제국대학 문과 계열 교수직에 진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과학기술 분야는 달라서 이태규와 리승기가 모교인 교토제국대학 이학부와 공학부의 교수가 되었다. 이들은 남북을 대표하는 과학자로 살다가 각각 국립묘지와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남과 북을 대표하는 과학자로 산 교토제대 교수 이태규와 리승기

'최초의 이학박사' 이태규는 해방 후 서울대 문리대 초대 학장을 역임한 뒤 미국 유타대학 교수로 활동하다가 1973년 귀국하여 박정희의 존경과 지원을 받으며 카이스트에 근무했다. 리승기도 서울대에서 가르치다가 월북하여 '비날론'의 공업화로 북녘 주민들의 의복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북한의 계관 과학자가 되었다. 

해방 후, 제국대학 졸업생들 가운데, 고병국(도쿄)·유진오(경성)·노용호(교토) 등 법학부 출신들은 제헌헌법의 기초안을 만들었다. 일부 인사는 이승만 독재에 협력하여 '사사오입' 사건에 부역하기도 했지만,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출신의 문교부 편수국장 최현배는 이승만의 한글 간소화 파동에서 직을 사임하고 이에 맞서 이승만의 시도를 좌절시켰다. 

제국대학의 졸업생들은 남한의 지식 재편을 주도했고, 북한의 지식 제도를 확립하는 데 이바지했다. 이들은 각각 '조선학'을 '한국학'으로, '일본 지식'을 '소련 지식'으로 바꾸어 냄으로써 지식의 주도권을 획득해 갔다.

저자는 "제국대학이라는 지식 제도와 관련된 근대 한국의 경험을 도덕적 이분법으로 모두 '악'이라 규정"하고 "그것을 '적출'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라면서 이러한 본질주의의 위험성을 경계한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 식민주의의 진정한 청산을 위해서라도 "제국대학이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의 실상을 '역사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연구가 그 작업의 첫걸음임을 확인하면서.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블로그 ‘이 풍진 세상에’(https://qq9447.tistory.com/)에도 싣습니다.


제국대학의 조센징 - 대한민국 엘리트의 기원, 그들은 돌아와서 무엇을 하였나?

정종현 (지은이), 휴머니스트(2019)


#제국대학#조선인 유학생#지배 엘리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쉰이 넘어 입문한 <오마이뉴스> 뉴스 게릴라로 16년, 그 자취로 이미 절판된 단행본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이 남았다. 몸과 마음의 부조화로 이어지는 노화의 길목에서 젖어 오는 투명한 슬픔으로 자신의 남루한 생애, 그 심연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