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하루는 가라, 일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노력. 시민기자 그룹 '40대챌린지'는 도전하는 40대의 모습을 다룹니다.[편집자말] |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나 신문 기사에서 <나의 첫 심부름>에 대한 이야기를 심심찮게 접한다. 넷플릭스에서 방영되고 있는 이 프로그램은 5세 전후의 아이들이 처음 심부름 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일본 관찰 예능이다.
나는 아직 보지 못했는데 반응이 꽤 좋은 듯하다. 사람들 말로는 자그마한 아이가 우여곡절 끝에 심부름을 해내는 모습이 꽤나 극적이고 감동적이라고. 나도 알고 있다. 아이들의 심부름에는 고군분투가 있다는 것을. 우리집 열 살 아이의 심부름 또한 그러하니까.
처음 심부름을 시킨 날
아이가 3학년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날 나는 아이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아파트 장터에 가서 저녁으로 먹을 돈가스 사 오기. 아이가 혼자 집 밖으로 나가 돈을 내고 음식을 사 오는 심부름은 처음이었다. 사실 그동안은 아이의 안전이 염려스러워 선뜻 심부름 보내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3학년이나 되었으니 아이를 믿고 시켜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가스 세트가 여러 가지가 있거든. 그중에서 1번 세트로 사 와. 소스는 두 개 고를 수 있는데 둘 다 안 매운맛으로."
나는 아이 눈을 보고 손가락으로 숫자 표시까지 해가며 말했다. 노파심에 한 번 더 설명하려고 하니 아이는 "오케이. 오케이!"를 외치며 부리나케 신발을 신고 나갔다. '잘 할 수 있을까? 어렵지 않은 거니까 잘 하겠지.'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청소기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아이는 무슨 일인지 내가 청소를 다 마쳤는데도 오지 않았다. 나는 걱정되어 다용도실 창문을 열고 아파트 장터를 내려다봤다. 돈가스 트럭에서 좀 떨어진 위치에 아이가 있었다. 보아하니 아직도 주문을 못한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자 아이가 안쓰러우면서도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15층에서 아이를 향해 힘껏 소리쳤다.
"도현아. 파이팅! 얼른 주문해!"
아이는 멀리서 들려오는 내 목소리를 용케 알아듣고는 나를 향해 두 팔을 들어 동그라미 표시를 했다. 그러면서도 아이는 돈가스 트럭으로 다가가지 않고 그 자리에 계속 서 있기만 했다. 나는 더이상 아이를 지켜봐 주지 못하고 장터로 내려갔다.
가 보니 상황은 이러했다. 저녁 거리로 돈가스를 사러 온 사람들이 많았고, 주인아주머니는 주문을 받으며 돈가스 튀는 일까지 하고 있어 매우 바빴다. 아이 말로는 아주머니를 향해 "저기요"를 여러 번 외쳤으나 자기를 봐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는 와중에 여기저기서 어른들이 와서 주문을 했고 자기는 계속 뒤로 밀리게 되었다고. 다들 온 순서대로 줄을 섰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아이는 사람들이 줄어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주문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엄마, 나도 어쩔 수 없었어요."
결코 쉽지 않다
아이가 어렸을 때 좋아했던 그림책 중에도 <이슬이의 첫 심부름>이 있었다. 책 속에 이슬이는 엄마 심부름으로 우유를 사러 갔는데 크게 나오지 않는 목소리, 자동차 소음, 다른 손님들 때문에 계속 주문을 하지 못해 애가 탄다.
내 아이가 겪은 상황과 거의 비슷하다. 책에서는 가게 아주머니가 마침내 이슬이를 알아봐 주시고, 지나친 것에 대해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신다. 이슬이는 그제야 마음이 놓여 눈물 한 방울을 똑 흘리고 만다.
현실은 책과 좀 다르다. 바쁘고 급한 어른들 틈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 한 발짝 떨어져 기다리는 아이가 있을 뿐이다. 만약 아이가 <나의 첫 심부름>에 나오는 아이처럼 좀 더 어리고 작은 아이였다면 심부름하는 게 귀엽고 기특하다며 도와주셨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열 살도 많은 나이는 아닌데… 주위 어른들이 알아봐 주시고 조금만 배려해주셨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결국 아주머니를 부르는 것은 내가 하고(내가 하는 말도 처음엔 묻혔다) 메뉴를 주문하고 계산하는 것은 아이가 했다. 만 원짜리 두 장을 손에 쥐고 자신 있게 집을 나섰던 아이는 예상치 못한 난관에 어깨가 조금 처졌다. 나는 아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괜찮아. 이게 원래 쉽지 않은 일이야. 잘했어."
나도 심부름을 시키기 전에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로 겪어보니 심부름은 아이에게 크나큰 도전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 후 나는 아이에게 되도록 심부름의 기회를 많이 주려고 노력한다.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심부름을 통해 아이가 배우는 게 많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순탄치 않은 일을 자꾸 부딪치고 경험해 봐야 더 성장하고 단단해질 수 있다.
내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아무리 좋은 학습활동을 제시해도 아이의 자신감, 용기, 책임감, 문제해결력, 집중력, 기억력, 자기주도성, 사회성을 길러주기는 힘들다. 그런데 심부름은 가능하다.
더 넓은 세상으로 가게 만드는 길
나는 카페나 음식점에 가서 음료나 음식을 주문하는 것, 냅킨이나 물을 더 달라고 직원에게 말하는 것, 남은 음식을 포장해달라고 부탁하는 것 등을 아이에게 시킨다. 분리수거 날에는 아이가 학원 가러 나갈 때 양손에 재활용품을 들려 보내고, 수시로 동네 마트나 문구점에 가서 필요한 물건을 사 오게 한다. 내가 하는 게 더 빠르고 효율적일지라도 아이가 해보게 한다.
열 살 아이의 심부름은 서툴다. 시킨 것과 다른 물건을 사 오거나, 빼놓고 안 사 오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조금씩 나아진다. 며칠 전에는 무인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오는 심부름을 시켰는데 가족들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종류별로 알차게 사 오고 영수증까지 꼼꼼히 챙겨왔다. 조만간 매일 아침 등굣길에 교통정리를 해주시는 경비 아저씨께 비타민 음료를 전하는 심부름도 시킬 생각이다.
아이는 심부름이 긴장되고 떨리는 일이지만 계속하고 싶다고 한다. 심부름을 하고 나면 도움이 된 것 같아 뿌듯하다고. 나는 아이에게 "넌 그냥 책 봐. 엄마가 할게"라는 말보다 "심부름 다녀올래?"라는 말을 하고 싶다. 그것이 아이를 더 넓은 세상으로 가게 만드는 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