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들의 실습이 시작되었다. 늦게 시작한 공부, 나는 2학년 1학기 기말고사를 끝으로 여름방학에 들어갔고 곧바로 실습이다. 160시간의 실습을 마치고 한 학기만 더 다니면 학교 공부가 끝난다.
처음 실습할 곳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잠시 고민했다.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일에 도전해야 하는가. 아니면 익숙한 일을 연계해서 선택해야 하는가. 내 결론은 익숙한 일이었고, 결정에 나름의 명백한 이유가 있었다.
사회복지 실습의 목적은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실천에 옮기는 기회를 제공하고, 실습 현장에서 새로운 실천 지식과 기술을 익히는 일이라고 담당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실습지를 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 근처의 지역아동센터다. 생업이 있어 매일 갈 수 있는 상황이 안 되어 화, 수, 금 3일 동안 5시간씩 32일 동안의 실습 기간이 내게 주어졌다.
'잘 할 수 있을까' 염려보다 나를 설레게 하는 게 있었는데 그것은 후배들을 만난다는 일이었다. 졸업을 기준으로 실로 46년 만에 아이들과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를 언급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두근거리는 마음이 앞섰다.
그 아이들과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글을 쓰고, 그림 그리는 일을 함께한다니 실습에 거는 기대가 몹시 컸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부터 초등학생, 중학생까지 골고루 있는 센터에서 나는 생애 첫 실습을 시작했다. 웃고 떠들고 장난치며 궁금한 게 많은 아이들을 보며 '이 녀석들과 어떻게 빨리 친해지지?' 의무감과 책임감이 생겼다.
아이들은 처음 만난 할머니 같은 실습생이 낯설어 조용히 있다가, 서로 소개를 마치고 나니 이내 왁자지껄 자리에 앉았다 일어섰다 집중하지 않았다.
첫 수업으로 선택한 책은 권정생의 <강아지 똥>이다. 내가 하는 모든 독서 수업의 시작 책은 으레 이 책이다.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없으며, 내가 무엇을 하며 살든 어딘가에 나의 쓸모가 있음을 알게 하는 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실과 인내, 희생으로 민들레꽃처럼 환해지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음을 전하고 싶어 늘 처음의 독서 수업에 빼놓지 않고 이 책을 선정한다. 더불어 글을 쓴 권정생 작가님의 생애도 꼭 들려준다.
"얘들아! 더럽다고 놀림 당하던 똥은 어디로 갔을까. 민들레꽃 뿌리에 반짝이는 이 보석은 어디서 생겼지?"
질문을 시작으로 아이들의 입이 터졌다. 어수선한 자리를 스스로 정리하면서 아이들은 책 앞으로 모여들었다. 떠드느라 들을 것 같지 않았는데 귀를 쫑긋, 책 읽는 소리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나 보다.
책 앞으로 다가와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쏟아 놓는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이런 풍경을 상상하고 실습 장소를 내 모교 아이들이 머무는 곳으로 선택한 것임을 비로소 실감했다.
까마득한 일이지만 내게도 잊지 못할 풍경 하나가 있다. 초등학교 3학년쯤으로 기억한다. 머리카락이 유난히 길고 목소리가 맑고 고와서 왠지 시골 학교에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선생님이 책을 읽어주면 육십여 명 아이들의 눈동자와 귀는 선생님을 향했고 교실은 쥐 죽은 듯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가 깜짝 놀랄 일이 벌어지게 생길 장면일 때쯤이면 아이들은 숨죽였던 가슴을 비로소 활짝 펴며 일제히 "와" 함성을 지르거나 박장대소하며 교실이 떠나가도록 책상을 치곤 했다. 나는 그때 이야기의 힘을 알았다. 나도 저런 책 읽어주는 사람이 되어야지, 저렇게 살면 참 행복할 것 같아서 그 풍경을 어린 가슴에 오래도록 담았다.
"너희들 몇 회 졸업생이야? 선생님도 너희들 하고 같은 학교 다녔어."
두 명의 중학생을 보면서 물으니 94회 졸업이란다. 48회 졸업생인 나와 아이들 하고는 거의 반 세기 가까운 세월이 흐른 것이다. 이 사실이 왜 이렇게 가슴 설레고 뿌듯하고 기특한 것인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학교 운동장에 잔디 있지. 그것 우리가 심은 거야. 너희들이 잘 가꿔서 지금껏 잔디가 잘 있었던 것이구나."
"진짜요? 헐... 대박이에요."
잔디 심은 이야기 하나로 아이들과 나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칠월과 팔월 삼복더위 한복판을 꼬박 실습으로 보내야 한다. 그동안 나는 아이들을 살살 달래고 어르고 어긋나게 행동하는 아이의 규칙을 바로잡아주거나 책 읽어주는 일을 하면서 실습 생활을 보낼 것이다.
그 사이 내가 읽어 준 책 한 권 한 권이 아이들의 마음으로 들어가 뿌리를 내리고 촉촉이 적셔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지만, 그저 내 바람일 뿐이다. 다만 실습 나온 할머니 같은 선배님이 읽어 준 그림책 한 권이 마음을 흐르는 한 줄기 물결로 남는다면 참 좋을 것 같다. 긴 생애 어느 여름 한 철의 특별함을 받아들이며 내게 주어진 생애 첫 실습을 보람있게 보내고 싶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어린 시절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말을 '대니 샤피로'의 책 <계속 쓰기: 나의 단어로>에서 보았다. 어쩌면 내가 선택한 지역아동센터라는 실습 장소는 오래전 내 어린 시절을 만나고 싶었던, 오랜 열망을 실천하는 일은 아니었을까.
내가 하는 실습은 누군가를, 특히나 아동을 가르치는 게 아니다. 아동들이 머무는 현장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얼마나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적절하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판단하는 실천의 장으로, 배우고 익히는 학습의 연장이다. 사회복지사로서의 내 역할은 어떤 자세여야 하는가의 태도 또한 배우는 기회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실습을 마치게 되면 전문가로서의 사회복지사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앞서 내가 만난 아이들에게 내 역할은 무엇이었나를 생각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사회복지라는 광범위한 틀에서 하나의 분야, 즉 아동을 대하는 자세와 그들의 행복한 삶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사람으로 변화된 내 모습을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