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은 김지하를 국사범으로 취급해서인지 한때 독방에 가둬놓고 옆방을 몇 개씩 비워놓고 일체의 접근과 통방을 막았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공산주의자로 만드는 진술서와 정보부의 공작을 깨뜨려야 했다.
이 시기에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을 시작으로 민주인사들의 '양심선언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김지하도 이 방식을 추구했다. 하지만 옆방과 통방조차 불가능한 절해고도와 같은 감방이었다. 생각나는데로 하나씩 메모하고 구상을 할 때 기적과 같은 일이 생겼다. 양심적인 교도관 전병용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조영래가 양심선언 초를 잡고, 김정남이 그걸 구치소로 전병용 교도관을 통해서 들여보냅니다. 김지하가 자기 의견을 붙여서 가필을 해서 다시 내보내고, 김정남이 받아서 조영래한테 갔다 왔다 이걸 몇 차례 했어요.
그게 한꺼번에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그러면서 자꾸 보완도 되고 그랬겠죠. 그러니까 양심선언을 보면 별 고급이론이 많이 나와요. 뮈 신학자 이야기도 나오고, 그거 김지하가 안에서 서적도 없이 감시당하는 상황에서 다 쓸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다 밖에서 정리해서 알려 준 겁니다. 신부들한테 배워오고. 떼야르 샤르뎅이니 신부 이야기도 많이 나오고요. (주석 8)
이런 과정을 거쳐 마련된 <양심선언>은 김지하가 있던 구치소 내 사동에 청소의 일을 맡은 소년수를 통해 민주회복국민회의 상임대표를 맡고 있는 명동성당의 윤형중 신부에게 전해지고, 윤 신부는 필리핀의 가톨릭을 통해서 일본의 소아(相馬) 주교에게 전달되어 해외에서 먼저 공개되었다.
한 시대의 '기념비적인 명문'이란 평을 받게 된 <양심선언>은 긴 내용이어서 몇 대목을 골랐다. 먼저 서문격의 앞부분이다.
정의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글을 보낸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모략이 지금 나에게 들씌워지고 있다. 박 정권의 억압자들은 나를 가톨릭에 침투한 맑스 레닌주의자로, 민주주의를 위장한 공산주의 음모자로 몰아 투옥하였다. 이제 곧 나를 교활 음험한 공산주의자로 영원히, 그리고 '합법적'으로 낙인찍기 위한 재판놀음이 벌어질 것이며, 그 결과 나는 이 땅에서 만들어져 온 숱한 관제 공산주의자의 대열에 끼게 될 것이다.
분명히 말해 두거니와, 이것은 나 개인에 대한 모략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민주회복운동 전체와 사회정의구현을 위해 투쟁하는 신ㆍ구교 교회에 대한 중상모략 소동의 일환이며, 특히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활동과 민주회복국민회의 및 일체의 청년학생운동을 용공으로 몰아 압살하려는 대 탄압의 예비작업인 것이다.
현재의 내 솔직한 심경으로는 내 자신에게 지난 4년 이래 가해지고 있는 박 정권의 이 더러운 상투적 모략에 대하여 한 마디 변명도 하고 싶지 아니하며, 또 이번 사건에 관한 최소한의 진실도 정보부원들의 '일체의 주장과 변명은 법정에서'라는 말대로 법정에서 밝히려 하였다.
그러나 사건이 나 자신의 근본적인 사상과 사회적 근거를 왜곡, 파괴하고 나아가 민주역량 전체와 내 소속 교회 그리고 후배학생들에 대한 막심한 피해로 확대될 수 있는 이 시점에서 양심에 따라 나의 사상과 진실을 명백히 밝히는 것이 역사와 민족에 대한 나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주석
8> <홍성우 증언>, 137~138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인 김지하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