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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지학순 주교의 재판소식을 알리고 있는 <가톨릭시보>와 구속 중이던 김지하 시인. 1974년 지학순 주교의 재판소식을 알리고 있는 <가톨릭시보>와 구속 중이던 김지하 시인.
1974년 지학순 주교의 재판소식을 알리고 있는 <가톨릭시보>와 구속 중이던 김지하 시인.1974년 지학순 주교의 재판소식을 알리고 있는 <가톨릭시보>와 구속 중이던 김지하 시인. ⓒ 가톨릭시보·작가회의
 
<양심선언>이 해외에서 공개됨으로써 유신독재의 용공조작이 전세계에 폭로되었다. 이로써 민청학련사건이나 정의구현사제단 그리고 민주회복국민회의를 싸잡아 좌경세력으로 몰아 제거하려던 공작이 허물어졌다.

그리고 김지하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양심선언'을 발표한 이후죠. 문세광이라는 교포 청년이 박정희 씨를 암살하려고 권총을 쏘았죠. 그런데 부인인 육영수 여사만 죽고 박정희 씨는 안 죽었어요. 그 교포 청년을 특수한 감방에 집어넣었는데 그 방이 아주 이상하게 만들어진 방입니다. 

그 방에 제가 들어갔어요. 남과 전혀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도록 완전히 격리된 방이었습니다. 물 두 컵하고, 하루 밥 세 끼 이외에는 아무것도 안 줬어요. 성경조차도 안 주었지요. 그때 저는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면회도 못 하고, 운동도 못 하고, 책도 안 주고 그랬어요. 하여간 1년 반 가량 그랬습니다.

일제강점기 총독부 조선인 직원이나 검ㆍ경 중에서 우리 독립운동가를 은밀히 도운 인물이 있었듯이, 유신독재 체제에서도 교도관들 사이에는 민주화운동을 도운 분들이 있었다. 

무슨 의식이 있지 않더라도 교도관끼리는 자기들끼리는 동지의식이 있습니다. 우애가, 전병용이 가서 통방하는데나 연락하는데 필요한 도움도 제공하고요. 사동 담당은 따로 있으니까, 전병용이 자기가 직접은 못하잖아요. 다들 김지하를 직ㆍ간접으로 도와주고 그래서 전부다 연결이 되더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때는 가족 면회도 안 시켜줬어요. 워낙 면회를 못하니까, 면회할 수 있는 게 변호사밖에 없는 거지요. 여러 가지 김지하에게 연락할 일이나, 김지하 이야기를 전해주는 메신저의 역할을 다 내가 했어요. 난 김지하를 몇 년 동안 면회 다녔어요.

사실 전병용은 여러 모로 민주화운동에 엄청난 역할을 했어요. 1970년대에 감옥 간 민주인사들은 전병용의 도움을 안 받은 사람이 별로 없을 겁니다.

제2의 인혁당 참변을 막아낸 <양심선언>은 앞서 소개한 대로 김지하→조영래→홍성우→전병용 등의 합작품이었다. 그럼에도 김지하 관련 자료에는 '김지하 작품'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1991년 2월 15일 설날 아침에 원주에서 쓴 <'나는 도적' 고백운동을 벌이자>는 글에서 <양심선언>의 원작자를 밝히는 '고백'을 하였다.

전 국민과 전세계가 다 아는 그 '양심선언'은 명백히 내가 쓴 것이 아니다. 고 조영래 변호사가 쓴 것이다. 감옥 안에서 어떻게 그 긴 문장을 쓸 수 있었겠는가? 나를 살리기 위한 벗들의 뜨거운 우정이었지만 그 뒤 적절한 시기가 되었는데도 사실대로 밝히지 않고 내가 쓴 것으로 계속 주장해온 나의 위선은 명성을 도적질한 명백한 기만이다. 양심선언으로 양심을 도적질한 것이 아닌가. 사람들이 명문장이라고 칭찬할 때는 우쭐하기까지 했으니 참으로 한심하다.


주석
10> 김지하, <예감에 가득 찬 숲 그늘>, 17쪽, 실천문학사, 1999.
11> <홍성우 증언>, 144쪽.  
12> 김지하, <뭉치면 죽고 헤치면 산다>, 42~43쪽, 동광출판사, 1991.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인 김지하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김지하#시인김지하평전#김지하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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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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