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을 시작하면서 동작 하나하나를 영상에 담아두는 작업을 했어요. 춤과 카메라의 움직임이 하나가 되다보니 멋진 작품이 탄생되더라고요. 그것이 제 춤의 역사예요.
그러다 얼마전부터 제 카메라에 정말 아름다우신 어르신의 모습들이 담기게 됐습니다. 재능기부프로젝트 '내생애봄날'이었죠. 촬영이 잡힐 때부터 가슴이 뜁니다. 이번에는 또 어떤 분이 주인공일까. 어떤 목소리가, 어떤 모습이 렌즈에 담길까. 올해 가장 잘 한 것이 '내생애봄날'를 만난 일입니다."
장마 후 무더위가 극성을 부리던 지난 3일 오후, 비보이 박훈 쌤을 봄날빈티지쌀롱에서 만났다. 훤칠한 키에 서글서글한 눈매를 가진 그는 살짝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내생애봄날' 촬영 중 어르신들을 보면 부모님 생각이 나지 않냐는 질문에 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기분이 좀 묘했어요. 속에서 좀 '쿵'하더라고요. 왜냐하면 엄마가 살아계시면 딱 저 정도 연세일텐데... 저렇게 해드리고 싶어도 저는 해드릴 수가 없잖아요. 첫 촬영 딱 끝나고 정말 많은 상념에 잠겼어요"라며 옅은 웃음을 지었다(관련 기사:
'뻔한 건 가라'... 이토록 '봄날' 같은 장수 사진이라니).
-요즘 서산에서 어르신들을 위한 '내생애봄날'프로젝트에 합류하고 있다. 뜻깊은 일을 하시는 모습이 아름답고, 서산 시민을 대신하여 감사를 전하고 싶다. 어린 시절부터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달라.
"제가 더 감사하다. 식상한 사진 대신 어르신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찾아 사진에 담고 영상을 남기는 프로젝트에 함께 하게되어 개인적으로 영광이다. 이 팀에서 내 포지션은 영상이다.
긴 시간 찍다보면 우리 어르신들의 모습에서 잔잔한 삶의 역사가 담겨있어 뭉클할 때가 너무 많다. 대한민국을 이만큼 바로 세워준 분들을 찾아 당신들의 가장 아름다운 봄날을 영상에 담아주는데 아이처럼 행복해 하시는 모습을 보면 내가 더 행복하다.
내 고향은 서산이 아닌 서울 돈암동이다. 1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평택으로 이사를 했다. 너무 급작스럽게 학교를 옮기는 바람에 전학을 가는 지도 모르고 어리벙벙한 상태로 작별인사를 했다.
아직도 기억나는 건 돌아서 나오는데 반 친구들이 유리창에 까맣게 붙어서서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던 거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울컥 가슴에서 눈물이 새어 나왔고, 내려오는 내내 울었던 것 같다. 그게 내 첫 번째 이별이었다."
-비보이를 하고 있다. 춤을 만나게 된 계기가 있다면?
"춤을 만나기 전까지는 요식업을 하는 부모님을 떠나 방학 때면 항상 논산 외갓집에 가서 농사일을 도왔다. 그러다 친구따라 강남 간 격으로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춤을 배웠는데 계기기 참 희한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펌프를 좋아했다. 우연찮게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를 중학교에서, 그것도 같은 반에서 만나게 됐다. 우리는 늘 오락실에서 마주쳤는데 그 친구 소개로 춤을 배우러 다니는 친구를 소개받았다. 그 친구 때문에 당시 주위에 있던 대부분의 친구들이 춤을 배우게 됐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지못해 끌려가는 꼴이었는데 사실 나는 친구들과 어울리기는 하지만 춤보다는 펌프하는 걸 더 좋아해 자주 게으름을 피웠다. 학원에서도 그냥 앉아서 구경만 하는 아이로 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초등학교 때 몸무게가 무려 80kg가 넘는 초고도비만에다 키도 다른 친구들보다 월등히 컸었기 때문이다. 신체적 조건이 핸디캡이었다. 지금도 사진으로 비교해 보면 다른 애들에 비해 고등학교 형 같은 느낌이 난다(웃음).
어느날 춤을 멀리하는 것을 본 친구와 작은 말다툼이 있었다. '너무 하기 싫은 걸 왜 자꾸 강요하려고 하냐'고. 비록 싸우기는 했지만 그 친구들이 너무 좋았다. 그후 '에라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지금 내가 활동하고 있는 '런피플팀'의 연습생으로 들어가게 됐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고, 그때부터 친구들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연습을 했다. 자그마치 하루 10시간씩 맹연습에 돌입, 때론 연습실이 없거나 피치못 할 상황이 생기면 길바닥이나 학교운동장에서도 연습을 했다. 그것도 모자라 연습실에서 먹고 자면서 춤에 빠져 들었다. 내게 주어진 모든 시간이 연습시간으로 채워지는 순간이었다."
- 학창시절 한때의 취미생활이라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고등학교 1학년 때 대회 첫무대를 시작으로 이 길에 들어섰다. 당시 얘기를 해달라.
"사실 춤으로 직업을 가지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학교 축제에 공연을 갔다 오게 됐는데 우리팀 리더가 멤버들한테 1만 원씩 주면서 '공연하고 받은 페이'라고 말해줬다. 놀랐다. '아하, 춤으로도 직업을 가질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내가 좋아하는 춤이 직업이 된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라 생각했다.
그때부터 물불 가리지 않고 정말 많은 공연을 경험하게 됐다. 오죽했으면 스무살, 군대가기 바로 전날까지도 수업과 대회심사를 했을까. 군대에서도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연습을 했다. 휴가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제대 후에는 맘 놓고 춤만 추면서 지냈으니 나의 춤 사랑은 시간을 초월한 것 같다(웃음)."
"성공의 의미가 좋아하는 일 하는 거라면, 내 인생은 성공"
-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가 바로 오늘날 '비보이 박훈쌤'으로 통하지 않나. 성공했다고 보는데 어떤가?
"어떤 걸 성공이라고 얘기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도 내가 좋아하는 춤을 추면서 먹고 살아가고 있으니 절반은 성공이라면 성공일까(웃음). 사실 성공이라는 의미 자체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지금까지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거다.
여전히 나는 '언젠가는 잘되겠지. 반드시 좋은 날이 올거야'라고 생각하면서 주어진 매 순간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하려고 노력한다.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긍정적으로, 잘 되지 않더라도 '이유가 있겠지. 잘 될거야'라고 생각하면서 문제를 빨리 털어 버리려고 애쓴다.
또 내 주위에는 과분하다고 생각할 만큼 정말 좋은 사람들이 많다. 한분 한분이 내 인생 전부인 춤으로 알게 된 사람들이다. 그러고 보니 인생의 반은 성공했다고 해도 무방한 것 같다."
- 서산과 어떤 인연으로 내려오게 됐으며, 당시 서산을 처음 본 느낌은 어땠나?
"처음에는 런피플학원 원장님의 수업 권유로 서산을 오게 됐다. 당시 우리 학원 원장님과 서산의 J&L댄스아카데미 김아무개 대표님이 서로 친분이 있으셨다. 나는 당시 촬영을 하면서 인연을 맺게 됐다. 그러면서 기존에 계시던 비보이 강사님이 그만두시게 됐고, 바톤을 이어 받아 내가 비보이반 지정 강사로 내려오게 됐다.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지만 서산을 처음 본 느낌은 '시골 같은 고즈넉함'. 항상 서울과 천안, 평택에 있다 보니 서산은 오면 올수록 좋았다. 특히 사람이 참 정겨웠다. 만약 사람 냄새가 없었으면 내려올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을 거다.
얼마나 좋았으면 가끔 일을 하지 않은 날, 문득 내려와 한적한 곳에서 영상작업을 하곤 한다. 숨은 매력들을 발견하면 일종의 재능기부로 홍보 촬영도 해드린다. 친구들에게 서산 소개도 하고. 그럴 때마다 참 뿌듯하다. 그 귀한 인연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 수업할 때 힘든 점이나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인지?
"힘든 점은 내 몸이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고 버벅거릴 때, 또 준비한 내용이 갑자기 막히고 수업 내용이 잘 전달되지 않을 때, 그때는 좀 답답하기도 하고 힘들다.
보람을 느낄 때는 내가 없는 상황에서도 친구들이 열심히 연습하고 노력해서 내가 가르친 것보다 더 뛰어넘는 모습을 보일 때, 그때는 참 대단하단 생각을 하며 보람을 느낀다. 여러모로 힘이 많이 드는 장르의 댄스라서 힘들다는 핑계로 연습을 피할 법도 하지만 그런데도 스스로 연습한 것을 영상에 담아 보내주기도 하는데 참 뿌듯하다. 그걸 보면 나도 더 연습하고 공부하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보람있을 때는 춤을 추면서 아이들이 즐거워하고 재미있다고 할 때다. 특히 '존경한다'라는 말을 해줄 때는 나도 모르게 더 열심히 해야겠단 생각을 하게 된다."
- 춤을 추면서 기쁜 일이나 슬픈 일, 또는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다면?
"춤을 추는 순간은 언제나 기쁘다. 하지만 슬픈 일도 있었다. 처음 춤에 입문하면서부터 알던 멤버 중에서 동갑내기 친구가 22살 젊은 나이에 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제일 먼저 춤을 시작하고 춤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던 친구였는데, 정 많고 개구쟁이 친구였는데 군대 휴가 나왔을 때 너무 갑작스럽게 내 곁을 떠나버렸다. 가족보다도 더 많이 봤던 친구였다. 친형제 같은 친구라서 너무 슬펐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이다."
- 비보이 댄서라는 직업 외에 영상제작을 시작한 이유나 배경이 있다면?
"공연을 하면 항상 영상을 찍어놓고 수집해 두는 습관이 있다. 내가 처음 올라갔던 무대 영상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계속 기록해 두고 있는데 상당히 의미있다고 본다. 그러던 찰나, 춤을 추면서 광고 회사에 1년 정도 근무를 할 경험이 생겼다.
그때 내가 했던 업무는 주짓수운동 용품과 도복을 판매하는 온라인 쇼핑몰 관리 및 판매, 광고 업무였다. 그 외에 주짓수 대회나 상품촬영, 편집을 하기도 했다. 근무를 하다 보면 홍보촬영을 하는 날도 있었는데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그러다보니 좀 더 깊이있게 공부를 하게 됐고 다양한 경험도 해나갔다."
- 어르신들의 장수사진 '내생애봄날' 촬영 재능기부 제안이 들어왔을 때 망설이지는 않았나?
"다른 생각 없이 바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어르신들은 촬영을 하실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다. 더구나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겪어오시다 보니 젊은 날의 추억이 드문 것도 아타깝다. 그래서 흔쾌히 승낙했고 무엇보다 내가 가진 달란트로 좋은 추억을 선물해 드릴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대하고 내려온다.
촬영할 때마다 '나도 이분들처럼 나이를 먹고 또 시간이 지나면 한때의 젊은 날로 다시 돌아가 사진과 영상을 남기면 너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참여하시는 모든 분들이 너무 다재다능하시다. 이렇게 좋은 분들이 함께 하시고 그 안에 내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 영광이다."
- 조심스런 질문인데 사진을 찍으면 먼저 가신 부모님이 유난히 생각날 것 같다.
"정말 많이 생각난다. 친구 같은 아들, 개구쟁이 같은 아들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서른이 넘도록 엄마라고 불렀다. 평소 우리 엄마는 몸이 좋지 않았다. 엄마 손을 잡고 병원도 같이 다녔고, 아픈 엄마를 위해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하지 않도록 공부를 하기도 했다.
2019년 유난히 추운 날, 아버지 돌아가시던 바로 그 연세에 엄마와 이별을 했다. 아버지 가시던 바로 그 장례식장에 엄마의 빈소가 차려졌고, 나는 그렇게 두 분을 먼저 보내드려야 했다. 지금은 엄마 본가가 있는 논산에 두 분이 나란히 안치되어 계신다.
장수사진을 찍을 때마다 부모님 생각이 가장 많이 난다. 살아계신다면 두 분도 저렇게 멋진 사진과 영상을 담아 드릴텐데..."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예전에 다큐멘터리를 찍은 적이 있다. 당시 마지막 질문이 '꿈이 뭐냐?'는 질문이 있었는데 내 대답은 '어렵게 춤추는 사람들에게 작게라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고 싶다' 였다. 정말 더 노력하고 성공해서 어려운 환경에서도 춤을 추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면서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늘 농담처럼 이야기한다. 죽을 때까지 춤추고 살다가 마지막에 '즐거웠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후회없이 살고 싶다.
어떤 일이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노력해서 타인에게 본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다. 더불어 항상 겸손하고 예의 바른 행동, 그 어떤 실력보다 인간성이 먼저 완성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서산시대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