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년 전 이맘때다. 젊은이 서넛이 경남 함양군 백전면을 돌며 할머니들을 만났다. 낯선 이들이 마당에 들어와 기웃거리는 것을 경계할 만도 하련만, 할머니들은 일단 말문을 트고 나면 선뜻 자리를 내주었다. 그러고는 시렁(선반) 위 단지나 처마 밑 고장 난 냉장고 따위를 주섬주섬 뒤져 이방인들이 원하는 '그것'을 꺼내 놓았다.
"이거시 노랑콩인디 시엄니 때부터 하던 거여. 바글바글 안 허고 차지니께 장은 이걸로 혀. 그리고 요거슨 부엉다리팥. 꼬뚜리에 털이 부얼부얼혀 이름이 그런가, 나도 몰러."
'이제 늙어서 농사 못 짓는다', '요즘 누가 토종으로 농사하냐'고 손사래를 치다가도 꼬치꼬치 캐물으면 어김없이 씨앗 주머니를 풀어놓던 할머니들. 모양도 색깔도 저마다 다른 그 씨앗들처럼 할머니 한분 한분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또 얼마나 다채롭고 흥미로웠던가.
그때 그 기억을 고이 간직해온 '함양토종씨앗모임'(이하 함토모)이 올해는 할머니들
의 삶을 기록해보겠다며 나섰다. 모임 대표 채화석과 총무 심영지를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토종씨앗, 없다 없다 해도 뒤지면 나와요
"다른 지역 선배들은 이미 한참 전부터 토종씨앗 모으는 걸 하고 있었거든요. 그에 비하면 우린 늦은 편이었지. 좀 일찍 했더라면 더 다양하게 씨앗을 얻지 않았겠나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할매들도 나이가 들수록 콩이나 팥 같은 거 빼고 나머지는 그냥 시장에서 모종 사다 심으니까." (화석)
2019년 3월부터 6월까지 함토모는 지리산작은변화지원센터의 공모사업인 '변화의시나리오'에 선정돼 '함양군 백전면 토종씨앗 조사 및 수집 활동'을 벌였다. 토종씨앗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단체 '토종씨드림'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한 일이었다. 그 결과 백전면 12개 마을에서 모두 55종의 토종씨앗을 거두었다.
당시 함토모 공동대표로서 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채화석씨에 따르면, 수집된 씨앗의 대부분은 할머니들이 비교적 쉽게 채종할 수 있는 콩과 팥과 들깨였다. 그중에서도 일명 '노랑콩'이라 불리는 메주콩이 많았는데, 할머니들에게 그 이유를 묻자 서슴없이 이런 대답이 돌아오더란다.
"맛있으니께. 이걸로 장 담그면 며느리도 귀신같이 알고 퍼 가."
할머니들의 주름진 손을 통해 건네받은 토종씨앗은, 일부는 모임 회원들에 의해 땅에 뿌려졌고 일부는 유리병에 담긴 채 그대로 남아 있다. 예기치 못한 사고에 의해 유실된 것도 적지 않다. '수집된 씨앗을 심어 더 많은 결실을 얻음으로써 토종씨앗을 널리 퍼뜨린다'는 게 애초에 이 활동을 시작한 목적이었지만 그걸 온전히 실현하기란 쉽지 않았다는 것.
"채종까지 하는 사람이 드물다 보니 씨앗을 나눠줘도 이듬해 돌아오는 게 별로 없는 거예요. 그래서 모임 운영진 내에서는 우리만이라도 꼭 (채종까지) 해보자고 얘기가 됐어요. 운영진이 일곱 명인데 서로 어떻게 하고 있는지 물어도 보고 챙겨주니까 확실히 더 책임감을 갖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수집이나 채종을 통해 얻은 토종씨앗은 앞으로 공용공간에 전시해놓고 안전하게 관리하기로 했죠. 함토모 사무실은 아니고 지인들이 쓰는 데를 빌려서(웃음)." (영지)
그러고 보면 함토모에게 지난 3년은, 좋은 의도가 항상 온전한 결과로 이어지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배우고 깨닫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기간과 코로나19 시국이 딱 겹친 것은 우연이었을 테지만, 외부 활동이 멈춰지면서 운영진끼리라도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새로 발돋움할 힘을 축적할 수 있었다. 그 덕분일까. 함토모는 올해 다시 지리산작은변화지원센터의 지원을 받아 새로운 활동에 나설 채비를 갖추고 있다.
"삼 년 전엔 토종씨앗 자체에 초점을 맞췄다면, 올해는 그때 만난 할머니들을 다시 찾아다니면서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게 목표예요. 살아오신 내력이라든지 토종씨앗으로 농사지은 이야기, 수확물로 뭘 어떻게 해 드시는지 그런 얘기들. 새로 얻을 씨앗이 있으면 물론 수집도 해야죠." (화석)
누군가 품지 않으면 사라질 것이기에
토종씨앗을 보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땅에 뿌려 거두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라면,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기록을 통해서만 사라짐을 막을 수 있다. 씨앗도 이야기도 누군가는 일부러 찾아가 보고 듣고 품을 때 살아남는다는 말이다. 함토모가 바로 그 '누군가'의 역할을 자처하고 나선 이유다.
"사전 조사도 할 겸 얼마 전 백전에 사시는 할머니 몇 분을 만나고 왔는데 삼 년 전보다도 훨씬 연로해지셨더라고요. 이미 요양원에 가신 분도 있고요. 몸이 좀 괜찮은 분들도 이제 농사 안 한다, 손 놨다고 하시는데, 또 우리가 계속 물어보면 그래도 콩이든 마늘이든 하나는 하고 계신 거야(웃음). 직접 뵈니까 하루라도 더 빨리 기록으로 남겨야겠다 싶더라고요." (영지)
2019년에 만났던 할머니 수십 명을 일일이 찾아가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에 그때 토종씨앗을 다양하게 내어주신 분, 혹은 씨앗은 별로 없었어도 유독 이야기가 흥미로웠던 분들을 중심으로 올해 방문할 대상을 추렸다. 만남과 기록을 한정해야 하는 점은 아쉽지만, 그래도 함토모는 '다시' 찾아가 '관계' 맺는 것에 의의를 둔다.
"우리가 하려는 게 단순히 씨앗 얻고 이야기 듣고 끝, 이건 아니거든요. 그런 작업도 결국은 관계성에서 나오는 거니까 이번 사업을 통해 할머니들과 관계를 유지하고 지속해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여름과 늦가을쯤에는 할머니들에게 전수받은 레시피로 밥상을 차려서 그분들을 초대해 함께하는 시간도 마련할 계획이에요." (영지)
"우리는 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이 뭐라도 같이 '노나먹는' 거라서(웃음). 코로나 전에는 달마다 정기모임을 했었는데 딱히 주제가 있진 않았어요. 텃밭에 뭐 심었는지, 어떻게 자라는지 얘기하고 도시락 같이 먹는 걸 주로 했지. 토종작물이 많이 나올 땐 시식회도 했고요. 같은 쌀 같은 감자라도 품종과 이름에 따라 맛이 다 다르니까." (화석)
'밥상' 나누며 '가치'를 공유하는 모임
어떤 모임이든 먹을 게 있으면 분위기가 좋아지지만, 함토모 회원들에게 밥상을 마주하고 먹거리를 나누는 것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토종씨앗은 이 땅에서 오랜 세월 대물림되는 과정을 통해 우리 몸과 삶에 최적화된 씨앗이며, 따라서 이를 심고 키워서 먹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식량 자급, 지속가능한 농사, 종자 다양성 보존, 건강하게 먹을 권리 같은 '가치'와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2018년 1월 서울에서 열린 토종씨드림 행사에서 '함양 사람' 셋(그중 둘이 채화석과 심영지다)이 우연히 만난 것을 계기로 그해 3월에 만들어진 함토모는 누가 봐도 '헐렁한' 조직이다. 규약도 회비도 없이, 동명의 밴드 가입자라면 누구든 회원이 된다. 하지만 모임을 지탱하는 내적 힘은 토종씨앗이 지닌 가치에서 비롯하기에, 함토모는 느슨할지언정 결코 무르거나 약하지 않다.
"저는 GMO(유전자변형생물/식품)에서 시작해 토종씨앗으로 관심이 확대됐는데요, GMO의 실체를 알고 나니까 앞에 놓인 음식이 다르게 보이더라고요. '이게 어디서 왔지?' '이게 과연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하는 의문이 들었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토종씨앗과 연결된 것 같아요.
그런데 이미 세계 종자 시장의 많은 부분이 다국적기업에 넘어가면서 각국의 토종씨앗이 사라지고 생물다양성이 무너지고 있잖아요. 더군다나 우리나라는 GMO로 만든 가공식품 수입 1위라 하고. 이런 걸 보면 다양한 종의 토종씨앗을 지키고 보존하는 게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죠." (영지)
"이걸 내가 왜 할까 생각했을 때 우선은 우리 것 우리의 권리를 지켜야겠다는 의무감이 있고요, 또 하나는 백전면 씨앗을 수집하면서 토종씨앗이 갖고 있는 가능성을 본 거죠. 쉽게 말하면 토종씨앗을 통해 가치와 돈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그때 할머니가 주신 토종마늘 먹어보고 그런 느낌이 확 왔다니까?(웃음) 맛과 향 자체가 달라요. 세 숟가락 넣을 거 한 숟가락만 넣어도 된다는 말이 딱 맞더라고.
저는 농사를 업으로 해서 그런지 토종씨앗도 경쟁력을 가져야 하고 그렇게 가야 한다고 봐요. 텃밭으로 작게 하는 것도 물론 좋지만 좀 크게 짓고 가공도 하고 그런 사람들이 나와야 한다는 거죠. 사람들이 시장에서 토종씨앗으로 만든 농산물이나 가공품을 살 수 있으면 좋잖아요. 저는 일단 수비초 칠성초랑 백전에서 얻은 그 마늘에서부터 시작할까 해요. 잘해서 내년쯤엔 팔아볼라고(웃음)." (화석)
"우리가 당신들의 이름을 불러줄게요"
코로나19라는 길고 긴 어둠을 통과해 다시 만난 세상은, 많은 이에게 그러하듯 함양토종씨앗모임 사람들에게도 설렘이고 떨림이다. 지난 5월 초 열린 '토종모종 나눔' 행사는 그런 마음들을 확인할 수 있던 자리다.
연휴 중간임에도 십여 명이 넘는 회원이 참여해 채화석 대표가 정성껏 키워온 토종모종을 기쁘게 맞이했다. 그 이름도 어여쁜 진안토마토, 옥지기가지, 쇠뿔가지, 수비초, 칠성초, 거창흰찰옥수수, 쥐이빨옥수수, 흰당근, 청호박, 따발이호박들을.
"귀촌하고 나서 모종 사러 시장 갔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어요. 저는 같은 가지여도 특성에 따라 다른 이름을 갖고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가지는 다 그냥 가지인 거야. 심지어 고추엔 칼라탄 같은 이상한 이름이 붙어 있고(웃음)." (영지)
"칼라병이라는 게 있어요. 칼라탄고추는 그 병에 강한 품종이라는 거죠. 당조고추는 혈당조절에 좋다는 뜻이고(웃음)." (화석)
그러고 보니 사람들이 왜 토종씨앗의 이름을 듣는 순간 '반해'버리는지 알 것도 같다. 지역과 색깔과 모양이 투영된 이름은 그 씨앗과 작물에 사랑스러움을 더한다. 그래서 자꾸만 불러보고 싶고, 반복해 부를수록 더 소중하고 귀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사실은 할머니도 그러하다. 그냥 뭉뚱그려 할머니라 칭하기보다는 앞에 이름을 붙여 무슨 할머니라 불러줄 때 그분의 한 생애가 지닌 고유성이 더 빛을 발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함토모에 의해 호명되는 씨앗들이, 할머니들이 앞으로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이름을 잃고 사라져가는 존재들의 이야기 타래가 줄줄이 풀려나기를. 그 이야기들이 널리 퍼져나가 누군가의 마당에, 텃밭에, 마음에 뿌려져 푸르른 새싹으로 돋아나기를. 그런 세상이라면 어쩐지 지금보다 아름다울 것 같다. 충분히 믿을 만한 예감이다.
글 | 자야
사진 | 임현택, 함양토종씨앗모임
기획/진행 | 누리
Author 자야
새벽 요가, 산책길의 노래, 지치지 않을 정도의 텃밭일, 마음과 마음의 이어짐, 용기 있고 다정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로 옮기는 것, 을 좋아하는 함양 주민입니다. 덧붙이는 글 |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는 지리산권 지역에 필요한 작은 변화를 이끌어내는 사람들과 공익활동을 지원하고 있는 민간 지원단체로, 아름다운재단과 사회적협동조합 지리산이음이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리산권 지역에서 직접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 모임, 공간, 네트워크를 소개하는 글을 싣습니다. 이 인터뷰는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홈페이지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