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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마리 말 아빠 대한승마원 마영달 원장 .
25마리 말 아빠 대한승마원 마영달 원장. ⓒ 최미향
 
"서울로 가면 다시 돌아오긴 다 틀린 것 같아 가족들을 고향에 맡긴 채 서울살이를 했어요. 지난한 과정을 겪으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사랑하는 고향과 가족의 사랑이었죠. 그냥 가만히 있어도 내게 넉넉한 위로와 힘이 됐거든요.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내 아이들이 돌아올 고향, 삭막한 현대생활에서 좀 더 따스한 감성을 지니고자 할 때 언제든 찾아와 동물과 교감하고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진정한 마음의 고향. 저는 로컬에서 먹고 살아도 도시의 삶이 전혀 부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만들고 가꾸어갈 겁니다."


지난 10일 서산시 해미면 삼송리에서 25마리 말 부자 아빠 마영달 대한승마원 원장을 만났다. 한때 지역에서는 '씨름선수 마영달'로 더 이름을 알린 그였지만 지금은 초야에 묻혀 조용히 승마원을 운영하며 세 아이의 아빠로 살아가고 있다.   - 그동안 해미읍성에서 조랑말체험을 하시는 모습을 뵀다. 어린시절 해미읍성에도 자주 놀러 오셨다는데 그 당시 얘기를 들려달라.

"나는 서산시 해미면 삼송리 버드실에서 태어났다. 농사를 짓는 부모님 아래 10남매가 옹기종기 모여 살던 우리 집은 아버지가 살아계실 동안까지는 가난했지만 늘 다복했었다.

내 나이 10살 때 아버지의 위암 3기 판정을 받으면서 위기를 맞았다. 어느날 막내인 내가 아랫목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은연중에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듣고 말았다. 형님들이 아버지께 수술하셔야 한다고 설득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3기는 수술해도 살 가능성이 별로 없다. 수술하려면 여기 땅 팔고 집 팔아야 하는데 그러고 나서도 산다는 보장이 없지 않으냐. 그런데 하고 나면 얘는 어떻게 하냐'라며 나를 돌아보며 한숨을 쉬는 것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내가 아버지의 발목을 붙잡구나. 나 때문에 아버지가 수술을 포기하셨구나'를 느끼며 스스로 자책하게 됐다. 그 얘기는 커가면서 늘 심적 부담으로 느껴졌다.

아버지는 병원 대신 굼벵이가 위에 좋다는 얘기를 들으시곤 그것을 자그마치 세 가마니 정도를 드셨다. 하지만 무 꼬챙이처럼 바싹 마른 몸으로 자식 걱정을 하시던 아버지는 2년을 더 사시다 초등학교 4학년 되던 해 돌아가셨다. 나 때문에 수술을 포기하신 우리 아버지.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아프다."
 
??????? 대한승마원 입구 전경 .
??????? 대한승마원 입구 전경. ⓒ 최미향
 
- 해미에서 씨름하면 마영달, 마영달 하면 씨름꾼으로 기억하던데 어떤 계기로 씨름에 입문하게 됐나.

"나보다 8살 많은 형이 고등학교에서 취미로 씨름을 했었다. 그 형이 나를 앉혀놓고 샅바 매는 법과 함께 씨름의 진수를 보여주곤 했다. 어린 마음에 그것이 굉장히 재미있어 힘든 줄도 모르고 따라 하다 보니 씨름에 입문했던 것 같다.

그때는 씨름이 축구와 야구보다 몇 배는 더 인기종목이었던 시절이었다. 나는 동네 선수가 되어 시합에 출전했고, 나가면 내 나이 또래나 형들과 붙어도 거뜬히 이기고 금의환향했다. 한마디로 지금의 BTS보다 더 인기 있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을까.

시합에서 늘 이기곤 해도 나는 늘 외로웠다. 이유는 그때마다 어머니는 내 곁에 없었다. 10남매를 키우기 위해 씨름판이 벌어지는 귀퉁이에서 여측없이 좌판을 펼쳐놓고 장사를 했던 우리 어머니. 어린 마음에 그 모습이 너무 부끄럽고 싫어서 짜증을 내거나 숨어다닌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자식을 위해 오직 희생만 하시는 어머니께 큰 돈을 안겨드리고 싶었다. 내가 잘하는 건 시름밖에 없었으니까. 또 당시에는 천하장사만 되면 천만 원의 상금을 주던 시절이었으니까. 씨름은 가난을 벗어나게 해주는 돌파구였다."
 
입구에 들어서면 보이는 전경 .
입구에 들어서면 보이는 전경. ⓒ 최미향
 
- 어머니 가슴은 어땠을까. 참 고생을 많이 하셨다. 어머니 얘기를 더 해달라.

"나의 멘토였던 바로 위 형은 길이 아니면 가지 않는 성격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달랐다. 어린시절 생각하면 어머니께 엎드려 사죄해도 모자란다. 나 때문에 사과하러 다니는 일이 더 많았다.

우리 어머니는 감을 우려서 단감으로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았다. 대추와 냉이 등 돈이 될 만한 것은 모두 시장에 내다 팔았다. 손바닥 마디마디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밤낮으로 가족을 위해 헌신한 우리 어머니였다.

당시 서산군체육대회가 열리면 메달과 상관없이 장구를 치며 퍼레이드를 했었다. 거기다 면민 중 누가 1등이라도 하는 날이면 서로 헹가래를 쳐주며 축하해줬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씨름 선수로 나간 나를 응원하기 위해 읍민들이 목청껏 '마영달 마영달'이라고 외쳐대도 우리 어머니는 여전히 그 자리에 없었다.

나는 그게 싫었다. 내 뒷바라지를 위해 부끄러운 모습 보이지 않으려 숨어서 물건을 팔고 계신 것이 속도 상하고 화도 났다. 그날 저녁, 화가 나 어머니께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며 '오늘만큼은 안 오면 안 되냐'고 빡빡 소리를 질렀다. '에이 내가 빨리 돈 벌어야지' 이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나중에는 이런 것들이 모여 반항심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던 어느날 도망가는 나를 빗자루를 들고 뒤따라 달려오시던 어머니가 결국 나를 잡지 못하자 그 자리에서 망연자실 쓰러지는 것을 봤다. 심장이 덜컥했다. 그 뒤로 더는 어머니의 매를 피하지 않았고 저러다 큰일 나겠다는 생각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25마리 말 아빠 대한승마원 마영달 원장 .
25마리 말 아빠 대한승마원 마영달 원장. ⓒ 최미향
 
- 씨름선수를 그만두면서 말의 매력에 빠졌다고 했다. 말을 접하게 된 계기도 듣고 싶다.

"체급이 없어지면서 설 자리가 마땅찮았다. 그러면서 서서히 씨름과 멀어지게 됐다. 말을 처음 본 것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다. 엄마 손을 잡고 서울 둘째 형 집에 갔었다. 그때 수유리에 조랑말이 끄는 마차를 보게 됐는데 그게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시골로 내려와서도 머릿속에는 계속 그때 본 말이 떠올랐다. 나도 말을 타고 총을 쏘는 서부영화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가난한 시골에 말이 어딨겠는가. 꿩 대신 닭이라고 말을 보지 못하니 소라도 타보기로 작정했다. 그날도 소를 몰고 싱싱한 풀들이 만발한 언덕으로 나갔다. 그러다 풀을 먹고 있는 소등에 몰래 올라타 봤다. 난리가 났다. 조용히 풀을 먹던 소는 웬 불청객이 자신의 등에 올라타자 사정없이 나를 흔들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 버렸다.

아픈 줄도 몰랐다. 오직 소등에 올라 앉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떨어지면 또 올라가고, 떨어지면 또 올라가기를 여러 번, 드디어 몇 날을 시도하면서 성공을 하게 됐다. 세상이 모두 내 것 같았다.

'언젠가는 꼭 말도 타봐야지'라고 했지만 영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러다 5년이 넘은 어느날 드디어 말을 만나게 됐다. 그날이 고등학교 수학여행이었다. 경포대 낙산사에서 중년 아저씨가 바닷가에서 비싼 돈을 받고 말을 태워주고 있었다. 나는 기회다 싶어 기꺼이 돈을 내고 말 위에 올랐다. 그 순간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왕복 한 번이 너무 짧았다.

'아저씨 저 한 번 더 타면 안 돼요?'를 반복하며 반 친구들이 찾는 줄도 모르고 계속 탔다. 나중에는 끌어주던 아저씨가 조종하는 방법도 간단하나마 가르쳐 주기도 했고, 심지어는 혼자 남겨두고 볼일을 보러 가기도 했다. 잠깐이었지만 그렇게 말타기에 심취하면서 나는 말과 한 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성인이 되어 회사 근처 승마장을 자주 기웃거리게 됐다."
 
대한승마원 벽화(마진식 작가) .
대한승마원 벽화(마진식 작가). ⓒ 최미향
 
- 확실히 말과는 인연이 많았던 것 같다. 말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계기는?

"고향에 내려왔는데 누군가가 말을 타고 막 뛰어가는 걸 봤다. 뭔가에 끌린 것처럼 그냥 막 쫓아갔는데 젖소목장을 하는 아는 형이었다. 반가운 나머지 이런저런 얘길 하던 도중 '형하고 저하고 말 한 필씩 놓고 탑시다'라고 제안했고 수락한 형 덕분에 목장 한쪽에 형님 말과 내 말을 놓고 키우게 됐다.

당시 나는 서울에 살면서 주말부부를 하고 있었는데. 주말만 되면 고향에 내려와 아들 손을 잡고 형이 있는 축사로 달려가 나의 애마를 타고 놀았다. 그냥 말과 같이 있으면 세상 행복은 모두 내 것이 되는 것 같았다.

나를 닮아서일까. 어느날 아들이 '아빠, 말이 다리를 절어요'라며 말의 아픈 부위를 찾아냈고, 또 '아빠 말이 설사해요'라며 미처 내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기 시작했다. 껌딱지 아들이 워낙 말을 좋아하다 보니 아예 아들 몫의 말도 사서 그때부터는 함께 말을 타고 산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때가 겨우 6살, 운동신경이 만만치 않았다. 도약과 시합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인 아들을 보며 주위에서는 선수로 나가도 되겠다며 칭찬을 해주었다."
 
동물을 유난히 좋아하는 마영달 원장 .
동물을 유난히 좋아하는 마영달 원장. ⓒ 최미향
 
-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아들이 장애물선수로 각종 대회에 출전하여 우승하면서 결국 그 길로 들어섰다. 아빠로서 뿌듯할 것 같다.


"뿌듯하면서도 굉장히 미안한 마음도 가지고 있다. 지금은 대중화가 됐지만, 당시만 해도 선수가 귀했던 시절이었다. 아들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시합에 나가기 시작했고, 조그만 녀석이 꼭 1등을 하니 여기저기 러브콜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도 그럴 것이 아빠가 해미읍성에서 체험승마, 마차를 하니 아들은 학교만 끝나면 바로 내가 있는 곳으로 달려와 말과 놀았다. 이 모습을 지켜본 관광객들이 '잘 탄다'는 얘기를 해주니 군중심리를 알게 되고, 그러면서 시합에 출전해서도 웃으면서 말을 탈 수 있었다. 뭘해도 기죽지 않은 것도 그 덕분이다.

아들은 방학이면 승마장으로 불려다녔다. 초등 저학년 녀석이 말을 타고 장애물을 넘으니 '저 애도 할 수 있는데 내 아들도 할 수 있겠지. 내 손자도 할 수 있겠지'라며 아들이 한 번 승마장에 가면 회원이 무려 30~40명이 그냥 늘었다.

커나가면서 아들은 좋은 말도 많고 훌륭한 코치들도 많으니까 스스로 가방을 사서 한 달씩 다른 승마장으로 떠나곤 했다. 하지만 공짜 레슨도 한두 번이지 체계적으로 올라가려면 돈이 한두 푼 드는 게 아니었다.

특히 우리 아이는 점핑 말부터 이래저래 억 단위가 넘는 돈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선수가 된다 해도 문제겠구나' 싶었다. 잘사는 아이들은 대부분 국가대표선수가 됐고,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만만한 승마장 하나 가지지 못한 채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모양새가 되기 일쑤였다. '우리 아들도 나중에 저렇게 될 수도 있겠다' 싶어 정신이 퍼뜩 들었다.

중3 아들을 불러놓고 얘길했다. '아들아 네가 가는 길은 정상은 하나지만 가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다. 네가 승마 선수를 안 해도 좋다. 승마 관련 직업도 있고, 교수도 있다. 관련 직종에 종사하면서도 얼마든지 취미 활동으로 말을 탈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안 되겠냐?'고 말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아들이 '저는 두 마리 토끼는 잡을 수 없습니다'라고 단호하게 거절하는 게 아닌가.

이에 질세라 나 또한 '아빠가 고향 해미에서 니가 나중에라도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놓겠다. 네가 말 관계 일을 한다면 후배 양성도 할 겸 뛰어놀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 주마. 그 대신 이제부터 지원은 없다. 결정은 네가 해라. 아빠가 정말 미안하다. 이제 방법이 없다. 네 말대로 나야말로 두 마리 토끼를 잡다 보면 네 엄마 병 들어 잘못될 것 같고, 우리 가정 잘못될 것 같으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라고 했다.

3일간 고민했던 아들은 '가장 잘할 수 있는 건 말밖에 없습니다. 저는 끝까지 제 자력으로라도 말을 놓지 않겠습니다'라고 했고, 나는 '알았다. 앞으로 모든 결정은 네가 해라'라며 아들의 결정에 더 이상 반대의견을 내지 못했다. 23살 아들은 여전히 자기가 좋아하는 말과 생활하면서 이제는 제법 밥벌이를 하고 있다. 생각하면 참 기특하다."
 
말에 대한 기본적인 학습을 배우는 학생들 .
말에 대한 기본적인 학습을 배우는 학생들. ⓒ 최미향
 
-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2011년도부터 준비하여 2014년도에 대한승마원을 오픈했다. 힘든 부분은 없는지?

"아이 엄마가 아들 시합에 늘 함께 다니다 보니 이쪽으로 눈을 떴기에 경제적인 부분 외에는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아들을 위해 1~2억짜리 (말)사 줘도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말)바꿔 줘야 하고, 그렇다고 태극마크 단다는 보장도 없고….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이니 얘가 끝까지 버틸 수 있을지도 고민이었다. 아들이 태극마크를 달지 못하더라도 꿈을 펼칠 수 있는 그런 곳을 만들어 주려고 했기에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다. 또 애들 엄마가 워낙 헌신적이었다.

애들 엄마의 로망은 아파트에 사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고맙게도 회원 관리부터 스케줄 관리, 집안 살림까지 1인 3역을 해내는 억척스런 사람으로 바뀌었다. 늘 미안하고 고맙다."
 
대한승마원 언덕에서 바라본 전경 .
대한승마원 언덕에서 바라본 전경. ⓒ 최미향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누군가는 자신을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라고 했지만 나를 키운 건 동물이었다. 마음결이 뾰족할 때면 바람을 가르며 말을 타고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결이 고운 나로 돌아와 있었다. 그 속에는 자연이 친구가 되어 나를 보듬어 주었다.

이처럼 동물을 좋아하지만 가까이하기에는 여전히 움찔하는 아이들에게 대한승마원을 자연학습장으로 만들어 주고 싶다. 자연에서 뛰어노는 여러 종류의 조류들과 동물들이 분명 치유와 위로, 행복을 전해줄 것이다.

무엇보다 아이들을 말 등에 태워 한적한 동네를 다니면서 개구리가 펄쩍 뛰는 모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곤충을 캠퍼스에 그려도 보고, 꽃을 보며 이름도 맞히고 향기도 맡아보는 그런 소소한 곳을 우리 친구들에게 선물하고 싶다.

또 늘 고민하고 있는 것이 동물복지다. 자연과 동물은 나 마영달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친구다. 내 친구가 배고픔이나 힘듦, 질병에 시달리지 않고 행복한 상태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도 내가 해나가야 할 몫이다. 나는 앞으로도 세상 모든 동물이 행복할 수 있도록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서산시대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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