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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시인이 한때 해남에 머물며 이 숲길에서 지친몸을 풀었다
▲ 서림공원의 가을 김지하 시인이 한때 해남에 머물며 이 숲길에서 지친몸을 풀었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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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여름 전라도 해남으로 이사했다. 원주에서 빚어진 여러 가지 불화와 집안의 내적 갈등에서 벗어나고 악화되는 신병치료와 생명사상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고자 함이었다. 원주를 떠나면서 가톨릭과도 거리를 두었다.

나는 가톨릭을 떠나기로 작정했다. 장선생님과 지주교님께 말씀드려서 이해를 얻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미사 때에 가끔씩 나타나는 시커멓고 불길한 그늘과 십자고상(十字苦像) 뒤 벽면의 흰빛이 눈이 멀 듯 강렬하게 나를 엄습하는 것, 일종의 흰빛과 검은 그늘의 심상치 않은 분열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은 두 분께 알리지 않았다. 알려봐야 실감이 가는 얘기도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내심 무엇인가 정신적인 어떤 징후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음을 막연하게나마 느꼈다. 술과 집안에 대한 내적 갈등이 화근이었다. (주석 6)

두 차례 해남을 다녀오고 난 뒤에 해남행이 결정되었다.

"내가 어렸을 때 6.25 전에 두 번 간 적이 있던 해남, 나는 그 해남으로 낙향할 작정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새 출발 할 것이었다." (주석 7)

지인의 소개로 해남군 남동 끝자락 천석꾼 천씨네 사랑채였는데 문간방이 둘씩 달려있는 고가였다. 집 매입은 동광출판사에서 전집 출간의 선인세로 충당할 수 있었다. 그는 이 집을 '아내의 집'이라 불렀다. 해남의 집에는 서울과 원주를 비롯 전국 각지의 지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조용한 전원생활'의 꿈은 사라지고 매일이다시피 술판이 벌어졌다. 손님들이 없을 때는 혼자서 마셨다.

"나의 술만은 고질이었다. 아침에 눈만 뜨면 모기장 안에서 머리맡에 놓아둔 소주병을 나팔분다. 그래야 정신이 드는 것이다. 그렇게 온종일 마시고 밤엔 밤대로 밤이라고 해서 마셨다." (주석 8)
 
김지하 님 산문모음.
 김지하 님 산문모음.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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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에게 그래도 해남 시절이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으로 꼽힌다. 아내와 두 아들의 행복해하는 모습에서 본인도 행복감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왜인지는 모르나 해남 시절의 그 남동집을 '아내의 집'이라고 불러왔다. 그 남동시절의 그녀가 왜 그리도 아리따웠던지! 그리고 두 아이는 왜 그리도 싱싱하고 즐겁고 귀엽던지!" (주석 9)

스님들도 들르고 목사님들도 들르고 신부님들도 들르고 증산교 사람들도 들르고 해남, 영암, 강진과 광주, 목포 양반들도 들렀다. 맞이하는 내 쪽에서 보면 매일매일이 장 서는 것과 같았으니 내 입에서 술이 떨어질 날이 없었고 아내는 반찬과 안주 장만하느라 쉴 틈이 없었다. 

아아, 그 매일매일이 기쁨이고 행복이었으나 아내에겐 더없는 고역이었고 나에겐 병의, 새로운 큰병의 시작이었다. (주석 10)
지난해 봄과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촛불집회를 계기로 신작 시집 <못난 시들> 펴낸 김지하 시인. 그는 순수했던 '촛불'은 우주적 사건이라고 평가했지만 촛불이 정치적 목적에 따라 변질된 부분에 대해선 아쉬워하며 이 다음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봄과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촛불집회를 계기로 신작 시집 <못난 시들> 펴낸 김지하 시인. 그는 순수했던 "촛불"은 우주적 사건이라고 평가했지만 촛불이 정치적 목적에 따라 변질된 부분에 대해선 아쉬워하며 이 다음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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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신분상 사인이지만 사회적으로 공인이었다.

그에게 따라붙는 유명세는 지역ㆍ계층ㆍ이념을 뛰어넘었다. 많은 사람이 만나고 싶어했고, 그와 전역에서 함께했던 인연들은 연을 잇고자, 새로운 역(役)을 원하는 이들은 또 이를 위해서 그를 찾았다.

이 시기 그는 술을 마시지 않으면 평상심을 유지하기 어려울 만큼 영육이 함께 흔들리고 있었다. 불의 정신이 물의 세계로 바뀌고 있었는 데 찾아온 이들의 대부분이 불의 인사들이었고, 불 그것도 잉걸불이 되길 원하였다. 김지하가 술을 많이 마시지 않을 수 없는 지점이었다. 그는 <해남에서>란 제목의 시 4수를 지었다. <해남에서 2」의 전문이다.

 동지 섣달이래도
 펄펄 흩날리는 눈 속에 
 동백은 피어 붉고

 서북풍 휘몰아치는
 자갈 많은 마당에
 분홍빛 맨발로 아이들 뛰어놀고
 내 마음 동지 섣달이래도

 동지 섣달이래도
 알 수 없는 그리움 한 가닥으로
 낯선 눈보라 새벽길
 첫발 내딛는 내 마음. (주석 11)


주석
6> <회고록(3)>, 132쪽.
7> 앞의 책, 137쪽.
8> 앞의 책, 142쪽.
9> 앞의 책, 141쪽.
10> 앞의 책, 146쪽.
11> <김지하 서정시전집 한 사랑이 태어나므로>, 420쪽, 동광출판사, 1991.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인 김지하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김지하, #시인김지하평전, #김지하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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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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