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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 사상을 설파하는 김지하씨 남조선 사상을 설파하는 김지하씨
남조선 사상을 설파하는 김지하씨남조선 사상을 설파하는 김지하씨 ⓒ 조우성
 
무주택자에게 잦은 이사는 고역이다. 문인이나 학자들처럼 책이 많은 집은 이삿집 센터에서도 달가워하지 않는다. 1990년대만 해도 일산은 조용한 전원도시였다. 야트막하면서도 빼어난 정발산이 좋아 이곳으로 이사온 문인들도 적지 않았다.

일산에 이사온 뒤, 매일 정발산에 오른다. 먼 강물, 지는 해, 뜨는 달, 어둑한 숲길, 흙, 바람, 돌. 모든 것이 나다. 대아(大我)의 체험은 나를 자유롭게 한다. 그러나 그 체험이 나의 독특한 인생으로 잘 자라오르지 않으면 소용없음을 느낀다. 땅거미 내리는 들판에서 콩대를 본다. 무수한 콩대가 다 달리 생겼다. 나도 그 다양한 콩대 중의 하나다. 그러나 무궁하게 생성소멸하는 큰 생명의 실현인 것이다. 나의 삶, 밥먹고 똥싸고 자고 깨고 생각하고 글 쓰는, 이 모든 것이 우주의 신비요 나 자신만의 생명 과정이다. (주석 3)

그는 동양고전에도 조예가 깊다. 일반에게는 다소 생소한 옹치격(雍齒格)이란 고사를 들어 그늘진 음달에 햇볕이 드는 개벽의 시대를 기원한다. 책의 서장 <옹치격 1>의 들머리 글이다.

세상이 뒤숭숭하다. '수서' '걸프'로 안팎이 시끄럽다. 우리네 삶과 마음도 뭔가 달라지고 있다. 차원 변화의 큰 교체기임에 틀림없다. 이런 때를 당하면 으레 예측이나 처방이 백화제방하는 법이다. 허나 이럴 땐 반드시 그늘진 응달에 눈을 돌리는 것이 옛사람들의 슬기였다. 응달에 버려져 잊혀진 그 무엇을 찾아, 옹치(雍齒)는 한(漢) 고조 유방의 부하였다. 지지리도 못나 평소 유방에게 괄시받던 옹치가 그러나 사활을 결하는 결정적인 전환점에서 유방에게 빛나는 도움을 안겨주었다. 

여기로부터 옹치격(雍齒格)이란 말이 나왔다. 건축가가 버린 돌이 모퉁이돌이 되었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우리의 옹치를 한번 찾아가 보자. 그것은 못나서 환하지 않고 침침하다. 보일 듯 잘 안 보인다. 찾는 방법도 옹치격일 것이요, 그 쓰임새가 드러나는 모양도 옹치격일 수 있다. 서둘 건 없다. 뒷짐 지고 슬슬 응달쪽으로 함께 가보자. 걸음새도 등신같이 미련ㆍ투박하게 옹치격으로! 그러나 끝내는 빛이 나는 옹치격으로! (주석 4)

뒤에서 다시 쓰겠지만, 그는 그림과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옹치격>에는 <난초>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두 대목을 뽑는다.

본디 난초는 가슴에 한(恨)이 많은 사람이 아니면 못 친다. 가슴에 부글부글 끓어 해소시킬 수 없는 울분이나 응어리가 있어 그 응어리가 밀어내는 힘으로 그 응어리를 뱉아내는 기(氣)의 순환운동인 것이다. 그래서 '친다'고 하고 혹은 '갈긴다'고도 한다. 중국의 정소남(鄭所南)이나 정판교(鄭板橋), 우리 나라의 추사(秋史)나 석파(石坡) 등이 모두 망국한(亡國恨)이나 유배(流配) 혹은 실지(失志)의 한스러움에서 난초를 친 사람들이다.

난초는 기에서 비롯하고 기에서 결판난다. 특히 장엽(張葉) 끝에서 그친 사람의 기를 살피는 것이다. 기는 속임수를 쓸 수 없는 것이요, 무심(無心)해야 참다운 기가 붓끝을 탄다. (주석 5)

나는 표연란(瓢然蘭)을 즐겨 쳤다. 판교(板橋)는 '바람에 흩날리는 난초 한 잎을 그리기가 가장 어렵다(瓢然一葉最難描)'고 했는데, 이것은 잎새와 바람을 함께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보이는 움직임을 쳐서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드러내는 일은 곧 한순간도 멈춤 없이 살아 움직이며 변화하는 마음이나 물건의 기(氣), 그 음양 운동, 공(空)과 색(色)을 한꺼번에, 위상(位相)과 운동을 한꺼번에 인식하는 직관(直觀)으로 가능하다.

난초는 내게 그런 훈련을 시켜주었다.
몽이란 바로 난초와 바람이 내 마음과 기와 이미 하나인 근원의 '일기(一氣)'에 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석 6)


주석
3> <옹치격>, 서문, 5~6쪽, 솔 출판사, 1993.
4> 앞의 책, 11쪽. 
5> 앞의 책, 86쪽.
6> 앞의 책, 87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인 김지하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김지하#시인김지하평전#김지하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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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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