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정부서울청사에서 학제개편안 관련 학부모단체간담회가 열렸습니다. 이날, 정지현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공동대표의 발언 장면은 큰 화제가 됐습니다. 울먹이며 정부의 학제 개편안을 비판한 정 공동대표의 팔을 박순애 교육부 장관이 잡으며 위로하려 하자, 그가 "위로받으려고 하는 게 아니다”라고 일갈했기 때문입니다. 정 공동대표는 4일 ‘만 5세초등취학저지를 위한 범국민연대’가 국회에서 연 기자회견에 나서, 윤석열 대통령에게 정책 철회를 공개적으로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이 자리에서 정 대표가 못다 한 이야기들을 덧붙여 보내온 편지를 그대로 싣습니다. [편집자말] |
윤석열 대통령님, 휴가는 잘 보내고 계신가요? 저희 영유아 부모들은 아이들 방학과 휴가를 맞이했지만, 뙤약볕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집에 있어도, 직장에 있어도 눈에서 뉴스를 떼지 못하고 있습니다. 답답하고 화가 난 마음에 밤잠을 설치며 무더위와의 싸움보다 불안과의 싸움을 힘겹게 이어가고 있습니다. 대통령과 장관의 성급하고 불친절한 국정운영으로 인해 우리 부모들의 휴가는 '엉망'이 되었습니다.
저는 2021년도생 딸을 키우고 있고, 올해 10월에 둘째 출산을 앞둔 영유아 부모입니다. 교육부 장관이 만5세 초등 입학 정책을 실행하겠다고 발표하는 것을 보며 저는 너무도 암담해졌습니다. 이 정책이 시행되면 저는 연년생 두 아이를 모두 일곱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수많은 커뮤니티와 기사 댓글들을 보십시오. 정책에 찬성하는 부모들은 찾아보기 어렵고 대부분 불안해합니다. '초포자' '7세 경단녀'라는 단어가 곳곳에서 등장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서너살에 놀게 두는 게 아니었는데, 너무 후회된다."
"그나마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이 공부 부담 없이 여유 있게 놀 수 있는 시기인데, 이것마저도 국가가 빼앗아 가는 거냐."
"그렇지 않아도 느린 아이인데 '초포자'가 될까 봐 걱정된다."
"이제는 '8세 경단녀'가 아니라 '7세 경단녀'가 나오게 생겼다."
"여덟 살에 입학하면 휴직하려고 재정 계획을 세워놓았는데 우리집은 비상이다."
영유아 부모들 모두 날벼락을 맞았다고들 토로합니다. 발달단계에 맞지 않게 1년을 앞당겨 입학을 시키게 된 부모들의 염려와 불안을 대통령께서는 어떻게 책임져 주실 겁니까?
대통령께서는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를 알고 계십니까?
"아이들 발달단계를 몰라서 이런 정책이 나온 것이다."
"이번 정책 발표는 대통령이 덮고 싶은 이슈가 있어서 띄운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에 대해서 대통령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회자되는 것은 장관과 대통령께서 말씀하시는 만5세 초등 입학의 명분들이 부모들과 국민들에게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요.
안타깝게도 이 정책은 제시한 목적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기대한 목적과 정책 시행의 결과가 다르게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안한 학부모, 들썩이는 사교육 시장
영유아기의 교육격차 해소와 국가교육책임을 실현하겠다면 학제개편이라는 수단 말고도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영유아기부터 공평하고 질 높은 교육과 보육을 공급하려는 의도라면, 학제개편 말고도 얼마든지 다른 정책을 고안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지금도 산적해 있는 입시 경쟁 문제를 해결할 비전을 제시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장관이 업무를 시작하자마자 부모들에게 고통을 한 가지 더 얹어주는 것입니까.
지금도 영유아들은 조기인지교육에 과도하게 노출되고 있습니다. '유아 중심, 놀이 중심' 누리과정이 완성되고 현장에서 안착되어가고 있지만 특별활동, 방과 후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으로 수학, 영어, 한글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지난해 첫째를 위해 어린이집을 알아볼 때 인지교육을 하지 않는 어린이집을 찾기가 너무도 어려웠습니다. 10곳 중 1곳 정도 될까요? 또 유아 사교육의 문제 역시 매우 심각합니다.
2020년 11월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강득구 의원실과 함께 소아청소년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를 대상으로 "조기인지교육이 영유아의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물었습니다. 소아청소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85.2%가 '부정적인 영향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고 응답했습니다. 그 이유로는 '학업 스트레스(95.7%)'가 가장 높고, '학습에서의 자율성 저하(69.6%)', '낮은 학습 효과'(60.9%), '창의력 저하(60.9%)' 순으로 응답했습니다.
또 조기인지교육을 받는 영유아들에게 나타나는 부작용 증상들에 대해 물었을 때, '짜증, 분노, 공격성 등 감정조절의 어려움과 같은 정서 문제(51.9%), 부모와의 관계 악화 문제(48.1%), 학습 거부와 같은 행동 문제(40.7%)가 많이 나타난다고 전문의들은 답했습니다. 기타 '집중력 부족 및 산만함, 낮은 자신감 등의 정서 문제, 복통 두통' 등의 신체증상도 많이 호소한다고 응답했습니다. 조기인지교육이 아동의 건강한 신체적·정서적 발달을 어떻게 저해하는지 알 수 있는 응답입니다.
부모들은 발달단계에도 맞지 않는 조기인지교육을 왜 필요로 할까요? 공교육에 신뢰를 보내는 건 아직 우리 사회에서 요원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과열된 입시 경쟁 문제에 대해 정부가 장기적이고도 근본적인 비전을 내놓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기관들은 인지교육이 아이들 발달단계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불안에 내몰려 초등학교 입학 준비를 시키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입시 경쟁 구조가 공고한 상황에서 입학 연령을 낮추는 정책은 영유아 아이들의 조기인지교육을 더 부추기는 결과만 낳을 것입니다. 이제 더 어린 연령대의 아이들에게 학교 갈 준비를 시키라는 신호와도 같습니다.
사교육 시장은 벌써부터 들썩이고 있습니다. '사교육 업체의 주가가 오르고 있다, 벌써부터 불안 마케팅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힘없는 아이들이 고통의 원인도 모른 채, 초등학교 입학 준비를 위해서 소중하고도 유일한 영유아 시기를 인지교육과 유아 사교육에 노출되도록 방치하는 것이 대통령께서 꿈꾸는 '출발단계부터 책임지는 국가교육책임'입니까?
'선한 의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문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박순애 장관은 지난 2일 학부모 단체와의 간담회에서 "선진국 수준의 우리 초등학교를 활용해서 아이들에게 교육과 돌봄을 통합하는 방식으로 안전한 성장을 도모하고 부모 부담을 경감시켜 보자는 것이 목표"였다며, 자신의 "선한 의지"를 강조했습니다.
'선진국 수준의 우리 초등학교'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대통령과 장관은 최근에 지어진 시설 좋은 초등학교를 다녀와 이 좋은 시설을 왜 더 많은 아이들이 누리지 못하고 있나 안타까웠나 봅니다. 그러나 양질의 교육은 시설로만 담보되는 것이 아닙니다.
간담회에서 만난 장관은 시종일관 "부모들과 소통하고 싶다", "좋은 의견을 달라", "국민들의 뜻에 따라 정책은 폐기될 수 있다"면서 소통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국민 반대 98%의 설문조사 결과가 발표되고 6일째 언론에서도 뜨겁게 비판을 하는 와중에도, 결국 "여론 수렴"과 "공론화"를 위해 반년 이상의 시간을 가지겠다 발표했습니다(장상윤 교육부 차관은 2일 KBS '최경영의 최강시사'에 출연해 "대국민 수요조사는 9월 정도부터 시작할 생각"이며, 이와 같은 사회적 논의, 공론화 과정을 거쳐 "내년 상반기 정도"에 그 결과를 발표하겠다고 말했다. - 편집자 말).
어제와 오늘, 아침과 저녁이 다르게 말이 바뀌는 장관과 교육부의 입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부모와 국민들은 이제 장관의 말을 신뢰하기가 더 어려워졌습니다.
이제 부모와 국민들은 대통령의 입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조속히 강구하라"는 메시지에서 다시 "공론화"를 말씀하신 대통령님, 지금 저희의 외침은 소통이 아닙니까? 공론화만이 소통입니까? 부모와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공론화가 아니라 "지금 당장 철회"입니다.
초등 입학 연령을 앞당긴다고 출발단계의 교육격차가 해소될 것이라고 믿는 부모는 아무도 없습니다. 교육격차 문제가 입학 연령을 당기는 것으로 해결될 것 같았으면 이전 정부들이 왜 진작에 추진하지 않았을까요? 교육격차 문제가 그렇게 단순한 대책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 일찍 깨어 뒤척거리니, 제 아이도 함께 일어나 뒤척거립니다. 저를 보며 빙긋이 웃는 아이의 얼굴을 보니, 부모로서 제가 할 일이 더 분명해졌습니다. 먼 미래의 행복이 아니라 오늘 하루의 행복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 하루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발달하는 영유아기 아이들에게는 오늘 하루의 행복이 가장 중요합니다. 대통령께서도 우리 영유아 아이들의 오늘의 행복을 지켜주는 부모의 마음으로, 잘못된 정책을 지금 당장 철회하여 주십시오.
2022년 8월 5일, 두 아이의 엄마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