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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한, "조선 독립을 시켜주지 않으면. 육혈포로 총독을 위시하여 모두 사살하겠다."(<매일신보>, 1924, 8, 4.)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3대가 독립운동전선에 나선 경우를 찾기는 쉽지 않다. 여기에 소개하는 분들은 3대가 독립운동에 헌신한 사례다. 동농 김가진과 그의 후손들이다.

김가진(金嘉鎭, 1846∼1922)은 3.1운동 이후 독립운동단체인 조선민족대동단을 만들어 총재로 활동하였고, 1919년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로 아들 김의한(金毅漢, 1900∼1964)과 함께 망명을 가서 192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햇수로 4년 동안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김가진의 아들 김의한도 중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1945년 귀국할 때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김의한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하여 그에게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의한의 아내 정정화(鄭靖和, 1900∼1991)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에 기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적을 높이 사서,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김가진의 손자 김석동(金奭東, 1922∼1983)도 중국에서 광복군으로 활동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처럼 김가진의 가문은 김가진 본인을 포함하여 3대가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김가진의 아들로 자신의 꿈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한 김용한(金勇漢, 1903∼1926)이 있었다. 이 글에서는 김용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김용한은 아버지 김가진과 어머니 전주이씨 사이에 1903년 11월 29일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친형이 독립운동가 김의한이다. 그의 아들이 독립운동가 김석동이다. 그렇다면 김용한은 왜 24살에 요절하였는가. 사연이 있었다. 아버지 김가진이 독립운동을 하려고 1919년 김의한과 함께 상하이에 망명할 때, 김용한은 17세였다.

김가진이 상하이 망명 이후 국내에 남겨진 가족들은 사글세집을 전전하였다. 살림은 빈한하였다. 김가진이 서거하던 1922년에는 서울 적선동 160번지에 남의 집 사랑채 두 칸을 사글세로 빌려 11명의 식구가 연명하였다. 47세가 되던 김가진의 아내는 동아일보 기자에게 "경찰서에서 내왕하는 사람을 성가시게 조사를 하는 까닭에 찾아오는 친척도 없습니다."('본보 기사에 경악한 고 김가진씨 가족의 비탄, 눈물이 비오듯하는 부인', <동아일보>, 1922, 7, 8.) 라고 말하였다. 일제 경찰이 김가진의 집에 왕래하는 사람을 계속 성가시게 조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용한은 아버지 김가진이 집에 없었지만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 근근이 배재학교를 다니며 '테니스' 우등 선수로 전 배재 사람들의 촉망을 받았다. 아버지 김가진의 서거(1922년 7월 4일) 소식을 동아일보를 통해서 알게 된 김용한은 때마침 국내에 들어와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 있던 형수 정정화와 함께 1922년 7월 10일쯤 상하이로 갔다. 기차로 부산까지 가서, 부산에서 연락선을 타서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상하이에 도착했다.

아버지의 장례는 1922년 7월 8일 상하이 만국공묘에서 이미 거행되었다. 김용한은 친형 김의한을 만났고, 형·형수와 함께 아버지 묘소에 참배하였다. 상하이에 한 달을 체류하였다. 이 상하이 체류 시기에 형 김의한, 형수 정정화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아래가 그 사진이다.
 
(앞줄 왼쪽부터 김의한, 정정화. 뒷줄 서 있는 젊은이가 김용한.)
▲ 1922년 상하이에서 (앞줄 왼쪽부터 김의한, 정정화. 뒷줄 서 있는 젊은이가 김용한.)
ⓒ 김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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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한은 1922년 당시 나이 20세로 신체가 건장한 젊은이였다. 한 달을 상하이에 머문 뒤 귀국하였다. 그런데 김용한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1923년 21세가 되던 나이에 발생하였다. 1923년 초에 그가 김상옥 의사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 경찰에 잡혀가 심한 고문을 당한 일이 발생하였다. 여기에 대해서 김용한의 형수가 되는 정정화가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시동생(김용한을 지칭)은 상해에서 약 한 달간 체류한 후 다시 귀국했는데, 그 이듬해 그만 의열단 사건에 말려들어 심한 고문을 받고 정신이상을 일으켜 4년여를 고생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던 것이다. 시동생은 상해에서 귀국할 때 마침 의열단원이었던 김상옥(金相玉)과 한 배에 타고 국내에 들어왔었다. 우연의 일치였다. 그후 김상옥의 폭탄 투척 사건이 나자 일경이 시동생을 연루자로 체포해 고문을 가했던 것이다."(정정화, <장강일기>, 학민사, 1998, 84쪽.)

김상옥(1889∼1923)은 1920년 5월부터 총독 사이토(齋藤實) 및 일본 고관을 암살하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같은 해 11월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1922년 11월 중순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인 이시영·이동휘·조소앙·김원봉 등과 의논해 일본총독 및 주요 관공서에 대한 암살·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다.('김상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상옥 모습
▲ 김상옥 의사 김상옥 모습
ⓒ 박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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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 의사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은 1923년 1월 12일 밤에 일어났다. 이후 김상옥은 1923년 1월 22일 일제 경찰과 교전 끝에 순국하였다. 필자는 김상옥 의사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 이후 일제 경찰의 행태와 김용한의 행적과 관련한 몇 개의 자료를 발견하였다. 여기에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23년 1월 12일에 일어난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 이후, 일제 경찰은 비상이 걸려 수사본부를 종로경찰서에 설치하고 특별수사대까지 꾸렸다. 일제 경찰은 다수 혐의자를 검거하여 강압 수사를 자행하였다.

당시 <동아일보>는 "자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밤낮 계속하여 활동하는 시내 각 경찰서에서는 약간만 의심이 있는 자이면 즉시 경찰서로 데려다가 엄중히 취조 중인데 그 혐의자로 종로서에서는 방금 30여 명을 인치하고 사실을 조사 중이며 이미 인치하고 사실을 조사한 후에 내보낸 사람도 적지 아니한 모양이며 기타 동대문경찰서에도 혐의자 세 명을 인치하였고 또는 본정서와 서대문서에서도 다수한 혐의자를 인치한 모양인데 그 중에는 젊은 여자도 있고 노인도 있다."라고 보도하였다.('수색본부는 종로에 市內各署와 연락활동, 혐의자 계속검거', <동아일보>, 1923, 1, 15.)

이처럼 서울 시내 각 경찰서에서는 "약간만 의심이 있는 자이면 즉시 경찰서로 데려다가 엄중히 취조"하였고, 특히 종로경찰서에서는 혐의자로 "30여 명을 인치하고 사실을 조사 중"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혐의자로 경찰서에 끌려간 사람들이 강압 수사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에서도 경기도 경찰부와 종로경찰서가 1923년 1월 27일까지 공범자와 연루자 등 30여 명을 검거하고 엄중 취조하였다('김상옥의 연루 검거, 조선에 들어와서 30명을 모집해', <매일신보>, 매일신보사, 1923, 3, 16.)고 보도한 것으로 보아도,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 이후에서 같은 해 1월 27일까지 상당 기간 일제 경찰이 공범자와 연루자 등을 상대로 고문을 자행했다고 볼 수 있다. 김용한의 경우도 김상옥 의사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 경찰에 잡혀가 심한 고문을 당하였던 것이다.

이후 김용한은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질환에 걸렸다. 정신질환의 병마와 싸울 때 그는 서울 운니동(雲泥洞) 101번지에서 남의 집살이를 하고 있었다.('김가진씨 애자(愛子) 김용한씨', <동아일보>, 1924, 7, 3.) 그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일제의 식민지배를 규탄하는 항일 투혼을 두 차례에 걸쳐 발휘하였다.

그의 나이 22세가 되는 1924년 7월 31일 오후 7시에 사이토(齋藤) 총독이 도쿄로부터 돌아오는 시간에 임박하여, 김용한은 경성역 경관파출소에 이르러 "조선 독립을 시켜주지 않으면. 육혈포로 총독을 위시하여 모두 사살하겠다"라고 외쳤다.('독립을 안 시키면 대관을 죽인다고', <매일신보>, 1924, 8, 4.) 아래는 그 신문 기사이다.
 
<매일신보>, 1924, 8, 4.
▲ ?독립을 안 시키면 대관을 죽인다고? <매일신보>, 1924, 8, 4.
ⓒ 박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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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한이 권총으로 사이토 총독을 사살하는 거사를 단행하지는 못하였다. 이후 김용한은 1924년 8월 5일 밤 서울 조선호텔에서 열린 일제 정무총감 환영연에 들어가서 몽둥이를 휘두르며 정무총감과의 면회를 요청하는 일을 벌였다.('정무총감에게 面會强請', <동아일보>, 1924, 8, 7.; '정무총감 만나자든 것이 최후로 한 작란이었다고', <동아일보>, 1924, 8, 8.)

이후 김용한은 처갓집이 있는 경기도 여주로 가서 요양하던 중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24세가 되던 1926년 여름 한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김용한은 아들 김석동(金奭東, 1922∼1983)을 남겼다. 남편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김용한의 아내가 1934년에 별세하였다. 별세하기 전에 김용한의 처는 "아들(김석동)을 중국에 있는 큰 어머니(정정화를 지칭)에게 맡겨서 키워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김석동은 1936년 봄에 난징에 도착하였다. 정정화가 중국에서 조카 김석동을 아들처럼 보살폈다. 김석동은 아버지 김용한의 항일 투혼을 이어받아 중국에서 광복군으로 활동하였다. 이처럼 김가진의 가문은 김가진 본인을 포함하여 아들, 손자까지 3대에 걸쳐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참고문헌>
정정화, <장강일기>, 학민사, 1998.
김자동, <임정의 품 안에서 상하이 일기>, 두꺼비, 2012.
김자동, <임시정부의 품 안에서>, 푸른역사, 2014.

덧붙이는 글 | 다른 매체에 송고한 바가 없습니다.


태그:#김용한, #김가진, #정정화, #김상옥 의사, #김석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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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한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과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와 한글학회 연구위원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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