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M 투어를 했다. 요즘 트렌디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그 RM 투어, 그것도 어쩌다 보니 아이들을 두고 나 홀로 다니는 여유로움까지 챙긴 채로 말이다. 이 무지막지한 폭염에는 에어컨 빵빵한 실내에서 쉬는 것이 최고라는 아이들과, 학교도 학원도 라이드 할 필요가 없는 지금이 전시회 즐기기에 적기라는 나의 필요가 서로 일치를 이룬 것이다.
내가 이 폭염의 날들에 전시회를 택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좀 더 한가하게 전시를 둘러보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나도 더위는 싫지만 붐비는 인파 없이 여유롭게 전시회를 보기에, 가장 덥다는 7말 8초는 안성맞춤이라고나 할까.
미술애호가 RM의 영향력
알고 있는 갤러리가 많지 않지만, 촘촘히 모여있는 갤러리들을 둘러보기엔 삼청동 만한 곳이 없어 일단 학고재 갤러리부터 들르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학고재에서는 정영주 작가의 '어나더 월드(Another World)'가 전시 중이었다. 어라? 그런데 나의 예상과는 달리, 이상하리만치 사람이 많았다. 체감하기로 정말 올여름 최고로 더웠던 날이었는데. 그런데 '어? 왜지?' 했던 의아함은 그림을 보면서 곧 사라졌다.
정영주 작가의 그림은 일반 회화와 달리, 한지를 구기고 찢어서 붙이는 방법으로 집의 형상을 만든 다음 아크릴 물감을 수십 차례 올려 완성하는 기법으로 그려졌다. 일단 한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질감에서 이미 마음을 빼앗긴 나는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지가 주는 편안함과 포근함이 달동네를 표현한 이 그림과 만나 왠지 모를 향수를 마구 자극했다고나 할까. 날이 저무는 풍경, 그리고 지붕과 지붕이 고단한 어깨를 맞댄 채 어둠 속에 잠기는 모습, 그 고단한 저녁 골목길을 밝혀주는 노란 가로등 불빛들.
그림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해도, 그 풍경이 주는 편안함은 오롯이 느껴졌다. 세상에 대체 이런 그림을 나는 왜 이제야 알았을까. 궁금해진 나는 바로 검색을 시작했다. 그런데 아하! 그제서야 알았다. 왜 이 폭염에 전시회에 이렇게 사람이 많은지를. 이번 전시는 2016년 이후로 한국에서 처음 열리는 정영주 작가의 전시회인데, 2020년 방탄소년단의 RM이 소장한 그림으로 알려지면서 유명세를 탔다고 했다.
바로 이 그림이 RM이 격찬한 그림, RM이 소장한 그림이었던 거다. RM이 미술 애호가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림에 대한 안목에, 선한 영향력에 급 감동이 밀려왔다.
15년 전부터 달동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작가의 그림이 이렇듯 세상에 알려지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게 된 것은 너무나 다행한 일이지만, 아쉬웠던 것은 RM의 영향력 덕분인지 작품이 완판된 것은 물론이요, 예약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향후 몇 년간 나올 수 있는 그림이 이미 다 선(先)예약이 된 때문이었다. 선뜻 구매할 수 없는 가격이었지만 예약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적금이라도 부어볼 생각이었는데 말이다. 나의 아쉬움은 그림이 비싸서가 아니라 눈 밝고 발 빠른 컬렉터가 많은 탓이라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RM의 안목에 감동을 받고 나니, 기왕지사 RM이 픽한 다른 그림들도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시작된 나의 RM 투어.
추상화에서 느껴진 따뜻함
검색해 보니 학고재에서 몇 걸음 떨어져 있지 않은 곳, 국제갤러리에서 'colors of 유영국' 전을 하고 있었다. 이곳은 RM이 인증샷을 남긴 그림이 있다는 곳이었다.
유영국은 개인적으로 한국 화가들 중에서 가장 관심이 덜한 작가였다. 상대적으로 그 시대 활동했던 다른 작가들에 비해 많이 부유했던 작가, '울진의 유부자'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부유했던 작가에게 감동적인 스토리텔링이 없다는 것이 이유라면 이유였다. 알다시피 김환기, 이중섭, 박수근 등 그 시대의 작가들은 얼마나 절절한 사연을 담고 있나. 어느 전시회에서, 담뱃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는 이중섭의 '은지화'를 보고는 가슴이 아팠던 기억이 있다.
게다가 유영국의 그림은 추상화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구상화도 못 뗀 햇병아리 미술 애호가인 나에게 추상화는 넘사벽이었다. 그렇지만, 그래도! 아무리 넘사벽이라 해도 RM이지 않은가. RM 스팟까지 있다는 그곳을 지척에 두고 그냥 갈 수는 없었다.
그런 마음으로 국제 갤러리에 들어선 순간, 그러니까 유영국 작가의 첫 그림을 마주한 순간, 뭐랄까... 내가 가졌던 그간의 편견들이, 너무나 부끄러워졌다. 나 자신에게 창피함이 밀려왔달까. 작가가 생전에 "내 생애에는 작품이 팔리지 않을 거야"라고 했다는데, 아마도 작가 자신이 시대를 앞서간 감각을 가졌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던 듯했다.
분명 어려운 추상화이고, 책에서 본 적도 있는 그림이었지만, 실물이 주는 감동, 그 색채적 압도감은 도판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감동이었다. 그래서 제목도 'colors of 유영국' 이었나. 그가 구현한 세련된 색채감에 한번 반하고, 자연을 그린 그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에 두 번 반했다. (세상에! 추상화에서 따뜻함이 느껴지다니!)
국제 갤러리는 밝은 벽면과 자연채광을 가진 갤러리여서 그랬는지 그의 파랑, 빨강, 노랑, 초록의 색채감이 더욱 돋보이는 것 같았다. 분명 옛날 그림인데 낡았다라는 느낌보다 세련되고 시원한 느낌이 먼저 드는데, 그 옛날에 어떻게 이런 색채감을 나타낼 수 있었는지 놀라울 뿐이었다. 여담이지만 큰 캔버스에 이렇게 풍부한 색감의 물감을 충분히 쓸 수 있다는 것에서 '울진 유부자'의 부유함도 느껴졌고 말이다.
유영국의 이번 전시회는 꽤 많은 그림이 전시되어 있는데, 국제 갤러리 K3관에 가면 RM이 픽한 그림이 있다. 대부분 그 그림 앞에서 RM과 비슷한 포즈로 사진을 찍는 것이 RM 투어자들에게는 필수 코스인 것 같은데, 혼자 온 사람들도 많아서 그림 앞에서 사진 품앗이는 그리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그 덕분에 나도 한 컷, 수줍게 남길 수 있었다.
그렇게 알찬 전시회 두 개를 보고 돌아오는데,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언제 또 이런 그림을 볼 수 있을까 싶어 보고 또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아무래도 RM이 쏘아 올린 작은 공, 나의 N차 관람의 포문을 열게 되지 않을까. 작가의 그림에 한번 놀라고 RM의 안목에 두 번 놀란 나의 RM 투어, 아마 앞으로도 쭉 계속될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