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노동자 건강'을 이야기하다
올해로 3년째 중, 고교 학생들에게 노동자 건강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혼자 가방을 메고 학교를 찾아다녔는데, 지금은 스무 명 남짓한 동료 의사 선생님들과 함께 교육을 다니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오랜만에 찾는 '학교'라는 공간과 선생님들, 또 교복을 입고 말똥말똥한 눈빛으로 저를 응시하는 학생들 앞에 서는 것이 무척 어색하고 쑥스러웠지만, 지금은 제법 친구처럼 함께 웃고 떠들다 돌아오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직업환경의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던 2011년부터, 완성차공장 현장실습생의 과로에 따른 뇌출혈 사례를 시작으로 수많은 청(소)년 노동자의 안전보건사고 소식을 접해 왔습니다. 한 해 2000명이 넘는 노동자가 목숨을 잃는 나라에서도 이팔청춘 청년들의 안타까운 소식은 유독 더 애틋하고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청(소)년들의 노동은 경력이 짧은 경우가 많고, 그래서 일터에서 미숙하기 쉽습니다. 또한 임시로 행해지는 노동을 하는 경우도 많아 불안정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각종 유해·위험 요인에 노출되는 '험한 일'을 많이 하게 됩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낮은 직장 내 지위로 인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위계에 의해 위험에 내몰렸던 사례도 적지 않습니다.
미래 일터의 안전보건도 결국 '교육이 희망'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노동안전보건 문제 해결을 '교육'을 통해 접근하곤 합니다. 노동자가 되면 채용 시점부터 정기적으로 안전보건교육을 받도록 법으로 강제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사업주 주도하에 교육이 이루어지다 보니 기술적, 이론적 내용이나 법과 제도 소개에 국한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육을 통해 피교육자에게 권리의식이나 감수성을 향상시키는 일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또한 일방향적 방식으로 주로 진행되다 보니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는 교육도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안전보건에 대한 지식도 너무나 중요하겠지만, 정작 중요한 건 본인이 어떤 권리를 갖고 있고 그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정당한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위험을 봤을 때 그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또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을 '유별나게 군다'라고 하지 않는 문화를 심어주어야 하는데, 사회 전체에 그런 권리의식과 감수성이 다소 부족하지 않나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청(소)년 노동자들도 그렇지요. 양질의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인 현 상황에서, 청(소)년 노동자는 조직이나 상사에 대한 충성을 요구받고, 이에 응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뒤로 밀려나는 구조에 속하기 쉬울지 모릅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안전과 건강에 대한 권리라는 가치가 흔히 뒷순위로 밀리곤 합니다. 물론 구조적 문제를 개선하는 것이 병행되어야 합니다만, 노동자 건강권 교육을 통해 노동의 주체가 될 미래 세대 학생들의 감수성을 제고시키고 권리의식을 함양시키는 것 또한 필요하다 느끼고 있습니다.
노동자 건강권은 노동인권의 한 분야입니다. 노동인권 교육이 임금, 근로계약서, 노동 3권 등 노동과 관련한 권리를 포괄해서 다룬다면, 노동자 건강권 교육은 주로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할 권리에 중점을 두고 가르칩니다.
노동자가 되기 전에 알아야 하는 노동자 건강권의 범위는 생각보다 넓습니다. 노동에 안전보건이라는 단어를 연계시키면 아르바이트 노동이나, 현장실습, 직업계고 교내 실습 환경 등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소위 '블루칼라' 직업군에 종사할 가능성이 큰 학생들이 대상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노동자 건강권 교육은 관리직, 서비스직을 포함하여 모든 업종에 종사할 미래 노동자에게 필요한 교육입니다.
노동자 건강권 교육에서는 추락하거나 끼이거나 부딪히는 재래식 사고만을 다루지 않습니다. 과로로 인해 유발 가능한 뇌·심혈관질환, 업무 스트레스와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한 정신질환도 다룹니다. 이런 문제들은 비단 육체노동에서만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사고 재해 못지않게 질병 재해 또한 중요하며, 신체적 건강 못지않게 정신적 건강 역시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이를 얘기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상대방에 대한 역지사지와 공감, 배려와 존중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더디지만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학생들은 노동, 안전, 건강, 권리 이런 단어보다는 '의사들은 얼마 벌어요?', '의사 되려면 몇 등을 해야 하나요?'라든지 '수능 끝났는데 이제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등에 더 관심을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원 문제집을 몰래 풀고 있는 학생들도 간혹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학생들의 입에서 '감정노동'과 같은 단어가 나오거나 '주 52시간제'를 하려는 이유에 대해 '쓰러지지 말라고' 등의 얘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다소 더디지만, 우리 사회가 발전하고 있긴 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흔히 백세 인생이라고 합니다. 와병 생활을 하지 않는 이상 우리의 삶은 노동과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긴 세월 동안 노동과 함께할 미래 세대 학생들에게, 일하는 사람의 안전과 건강은 누군가의 시혜가 아닌 기본 권리라는 것을 얘기해주고 싶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박승권 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후원회원으로 직업환경의학전문의입니다. 이 글은 한노보연 월간지 일터 8월호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