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 잠이 잘 안 왔다. 아침에 눈을 떠서 생각했다. 예상대로 갈 것인가. 아니면 뒤엎을 것인가. 순진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과 다른, 기대했던 판결은 없었다."
이명박 정부 시기 국가정보원의 민간인 사찰 대상이었던 이성근 전 대운하반대국민행동 공동집행위원장이 마이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 그는 "혹시 모를 기대가 잘못된 것임을 확인했다"라며 실망감을 내비쳤다. 이른바 '불법사찰' 논란과 관련해 사법부의 엄벌을 바랐지만,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무죄'... 351호 법정 안팎 다른 표정
19일 부산지방법원 형사6부는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박형준 부산시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국정원 문건은 내부 보고 과정에서 생성된 것으로 보이고, 청와대에 전달된 원본이 아니"라며 "이번 사건의 증거로 사용될 수 없다"라고 판시했다. 또 지방선거 당시 발언도 사찰 관여 의혹 제기에 대한 답변이나 해명으로 이해해야 한다며 허위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청와대 홍보기획관을 지낸 박 시장은 4.7 보궐선거에서 "백번을 물어도 사찰을 지시한 적도 관여한 적도 없다"라고 발언해 시민단체로부터 고발을 당했다. 이를 검토한 부산지검 공공외사수사부는 지난해 박 시장을 재판에 넘겼다. 이후 여러 번의 증인신문 등 재판이 열렸고, 지난달 검찰의 500만 원 구형을 거쳐 1심의 결론이 내려졌다.
"이 사건의 공소사실은 범죄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 재판부는 박 시장의 손을 들어줬다. "사찰에 관여한 사실이 있고, 공명선거를 저해하는 중대범죄를 저질렀다"라는 검찰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 개시 이후 열 달 만에 내려진 사법부의 첫 번째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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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시장 지지자들은 환영했다. 판결문을 읽은 김태업 부장판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351호 법정에 "만세"라는 환호가 이어졌다. 법원 측의 제지에도 흥분된 목소리는 가라앉지 않았다. 지지자들은 "당연한 결과"라고 반응했다.
언론 앞에 선 변호인단의 원영일 변호사는 "공소사실 자체에 문제점이 많았다. 지극히 정당한 판결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전진영 부산시 정무기획보좌관은 코로나19 격리로 출석하지 않은 박 시장의 공식 입장을 대독했다. 그는 "사법 정의가 살아있음을 보여줬다"라며 무죄 결과를 반겼다.
법정 안과 달리 밖의 표정은 어두웠다. 4대강자연화시민위원회, 내놔라내파일시민행동, 부산시민운동단체연대, 부산환경회의 소속 단체 회원들은 바로 부산지법 앞에서 달려가 기자회견을 열었다. 심각한 얼굴의 이성근 전 집행위원장도 이들 중 하나였다.
"이명박 정부 당시 4대강 사업을 반대했던 시민단체와 일부 인사들의 신상정보는 세세한 부분까지 국정원에 넘어갔다. 의도적 활동 방해 공작 등으로 활동이 위축되고 명예가 훼손되는 등 극심한 피해를 봤다."
이 전 위원장과 피해자들은 "불법사찰에도 책임을 묻지 못했다.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즉시 항소에 나서라"라며 검찰의 추가 대응을 요구했다. 고발에 참여한 내놔라내파일시민행동의 김남주 변호사는 면죄부가 아닌 상급심에서 1심 결과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이런 비판 속에 검찰도 공식 반응을 내놨다. 부산지검은 판결문을 검토한 뒤 항소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여진은 정치권까지 이어졌다. 야당은 각각 성명으로 무죄 판결을 규탄했다. 진보당 부산시당은 "MB정부 핵심 요직이었던 박 시장이 불법사찰을 몰랐다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라며 논평을 냈다. 더불어민주당 부산시당은 "치밀하지 못한 검찰 수사와 봐주기 재판이라는 의심이 든다"라고 의견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