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처럼 새벽에 눈을 떠서 책방 손님들에게 보내는 아침편지를 썼다.
"군산과 지척인 장항의 송림숲에 맥문동이 피어 장관을 이룹니다. 여러 식물들의 식재를 보았지만 이처럼 바닷가와 어울리는 꽃단지는 처음인 듯합니다. 서해안 특유의 진회색 갯벌과 들고나는 바다를 풍경으로 늠름하게 서 있는 해송들의 기개와 넓은 품. 신비로운 보랏빛 맥문동 꽃의 사랑스런 애교를 지그시 내려보며 바다보다 넓은 자상함으로 안아줍니다.
습기를 가득 안고 내리는 장맛비로 우리들의 몸이 이내 습자지가 되어도 해송과 맥문동의 아름다운 궁합을 보는 즐거움에 마냥 아이들처럼 놀았습니다. 중년의 오십대를 장항솔밭에 다 던져버리고 반나절을 나무와 꽃으로 채웠지요.
솔나무의 껍질을 만지면서 순간 정재찬 교수가 문정희 시인의 '나무학교'라는 시를 읽어주면서 했던 말이 언뜻 생각났지요. '늙음은 젊음의 부족일 뿐, 젊음의 사라짐 상태가 아닙니다.' 일요일은 오늘(21일), 맘을 쉬고 싶은 분들은 '장항의 해송과 보랏빛 맥문동이 장관인 송림숲'을 추천합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일요일은 꽃구경
보랏빛은 신비로움의 최고치이다. 우아함 속에 슬픔이, 화려함 속에 고독이, 위엄 속에서 외로움이 공존하는 천상의 빛이라 칭한다. 보라색이 담고 있는 파랑과 빨강은 혼자 있을 때보다 공존의 이유를 더 잘 아는 듯하다.
보라빛을 바라보면 심리적으로 두려움을 주는 마음 속 파편 조각들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 같다. 마치 천상의 정화수를 담고 내려오는 구슬빛처럼. 이 보랏빛을 더욱 더 천상의 선물로 보여주는 맥문동 꽃방울을 만나러 장항송림산림욕장을 찾았다.
이곳은 군산에서 20여 분 거리에 있다. 금강의 아랫단인 하구를 공유하면서 어부들의 산실인 선창의 정물이 마주하고 있다. 30년 간 친정아버지의 고깃배가 들어올 때마다 포획한 생선들을 어느 곳에 풀 것인가 하는 고민이 상존했던 곳 중 하나다. 생선의 시세에 따라 군산의 일명 '째보선창' 또는 장항의 선창에서 경매하던 기억이 난다.
오늘도 장항 쪽 해안가를 따라 아버지를 만나러 왔었던 장항수협과 지금은 근대 상징물로 서 있는 장항제련소 굴뚝을 지나 장항송림산림욕장으로 이어졌다. 사실 어제도 책방 운영을 도와주는 지인들과 한 시간여 정도 이곳을 찾았다. 집에 돌아오니 혼자만 꽃 구경 한듯해서 남편과 애들에게 미안했다. 새날의 일정표에 '다시 또 가자, 맥문동을 만나는 가족여행!'이라고 썼다.
아침편지를 받은 책방지인들 몇 분이 답장을 주었다. 당신들도 꼭 시간 내서 가보고 싶다고 했다. 혹시나 그곳에서 만날 사람들이 있을까 싶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사랑하는 후배 부부를 만났다. 편지 받고서 '일요일은 가족과 함께 꽃구경' 하는 걸로 정했단다. 어제처럼 오늘도 전국 각지에서 온 듯한 각 지역 사투리들이 곰솔나무 사이사이를 거쳐 맥문동의 꽃에 내려앉았다.
남편은 나와 아이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자 연신 이곳에 저곳에 서보기를 권했다. 다 큰 자식들은 예쁘게 추억사진 한 장 남기고자 하는 남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헐렁하게 대답했다. 상심한 남편을 표정을 보니 마음이 짠해서 말했다. "각시나 예쁘게 찍어줘봐요. 애들은 다 알아서 살아요. 당신 모습도 내가 이쁘게 찍어줄게요." 말 한마디에 남편이 활짝 웃었다.
글을 쓰면서 그림 대신 사진을 잘 찍어서 스토리와 연결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사진에세이도 출간하고 싶은 욕심에 사진 자료를 잘 정리하고 있다. 사진 찍기를 따로 배우지 않았어도 자주 찍다보니 부족한 대로 예쁘고 세련된 모습들이 눈 안에 들어왔다. 처음 남편을 만났을 때, 서울의 한강대교 위에서 찍은 일몰사진과 인물사진을 찍는 남편의 취미에 호기심이 생겨 데이트를 허락한 적이 떠올라 혼자 웃음이 나왔다.
방문객 실망시키지 않는 산림욕장
어제도 지인들과 맥문동, 소나무를 배경으로 백여 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남편을 따라가며 사진찍기 좋은 위치와 인물의 구도설정에 대해 열심히 맞장구를 치며 들었다. 최근 코로나 후유증으로 눈이 불편해진 남편이 사진찍기를 오랫동안 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그 기술이 어디 가지 않고 있었다. 어느새 나의 움직임을 따라다니며 찍은 사진들이 맘에 들어서 남편의 요청을 들어주며 모델이 되기도 했다. 그 사이 진짜 모델같이 키도 크고 예쁜 후배 부부도 멋지게 사진을 찍어주었다.
후배의 남편 양병재님은 직업이 한의사이다. 여행 후기를 쓸 요량으로 맥문동의 효능을 물었다. "폐의 양기능에 좋은 한약재구요, 특히 기침과 천식을 완화시키고 기관지 염증제거에 좋은 효과가 있어요. 뿌리를 차 우리듯 해서 가볍게 단복하면 좋지요. 요즘 코로나 후유증으로 잔기침을 계속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맥문동도 좋은 효과가 있습니다." 이십여 년간 만나왔지만 언제나 양반의 후예 같은 말솜씨와 매너를 가진 분의 말씀을 잘 새겨들었다.
군산도 바닷가, 장항도 바닷가인데, 송림산림욕장에 갈 때마다 상심이 느끼는 이유는 뭘까. 인구수도 많고, 중소도시로서 빠짐이 없는 군산이 바닷가의 자연산물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서이다. 친정아버지가 활동했던 1990년대까지만 해도 군산은 고기잡이 어선들이 바다의 꽃처럼 피어났었다. 그러던 고깃배들이 지금은 십분의 일도 채 남지않았다. 그러니 바닷가로서, 선창으로서의 제 기능이 소실된지 오래다.
건너편에 있는 장항은 군민들의 힘으로 해안선을 살렸다. 다른 건 차지하고라도 장항송림산림욕장을 찾는 방문객들의 발걸음에 실망을 주지 않는다. 장대한 해송이 즐비하여 보는 사람은 누구나 소나무 키만큼 몸도 생각도 하늘로 쭉쭉 뻗어 나갈 것 같다. 맥문동은 큰 나무 밑, 음지에서 잘 자라고 여러살이해 풀이어서 생존률이 매우 높고 몇년씩 계속해서 보라색 신비로움을 만끽할 수 있다.
서해바다가 만들어내는 보석 같은 갯벌 위에 서서 바닷바람을 맞았다. 등 뒤에 있는 수 많은 소나무들이 어느새 나의 방패가 되어 든든한 품으로 안아주었다. 우리네 일상의 지친 삶에 이런 요새가 늘 상존해준다면 더없이 기쁠 것이라는 생각이 밀려왔다. 그사이 다가온 아이들과 함께 맥문동 꽃과 소나무를 보고 있노라니 남편이 등 뒤에서 사진 찍는 소리가 들려온다. 마치 해풍을 다 품어 안는 소나무의 장벽처럼 든든했다.
돌아오는 우리들의 마음이 어느새 보랏빛으로 물들어서 맥문동의 꽃말처럼 '기쁨의 연속'이었다. 비록 장항군민은 아닐지라도 장항 송림산림욕장의 맥문동 홍보대사가 되어서 지인들에게 사진을 날렸다. 오늘을 놓치지 말고 꼭 가보시길, 특히 가족과 함께 사진 한 장 남겨놓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