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국내외 864개 시민사회단체는 22일 공동성명을 통해 놀린 헤이저(Noeleen Heyzer) 유엔 미얀마 특사와 군부 지도자 민 아웅 흘라잉(Min Aung Hlang)의 만남을 규탄했다. 또 헤이저 특사를 직무정지하고 유엔 사무총장이 직접 미얀마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을 유엔사무국에 촉구했다.
미얀마는 2021년 2월 1일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아웅산 수지 국가고문이 이끌던 민간정부를 전복하고 이에 저항하는 시위와 무장저항 운동에 대한 유혈탄압을 이어오고 있다.
싱가포르 출신 놀린 헤이저 유엔 미얀마 특사는 지난해 10월 25일 임명된 뒤 10개월이 지난 이달 16일 처음으로 미얀마를 방문했으며, 다음날인 17일 수도 네피도에서 군부 지도자 민 아웅 흘라잉과 회담했다.
"성과없는 방문, 군부에 선전거리만 제공해"
미얀마 현지언론 <킷띳 미디어(Khit thit media)>는 이날 시민단체 '진보의 목소리(Progressive Voice)'가 발표한 864개 시민사회단체의 공동성명을 인용해 "놀린 헤이저 특사의 이번 방문은 유엔이 미얀마 군부를 대상으로 '미얀마 특사'라는 직책을 통해 수십 년 동안 벌여온 외교적 전통이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무의미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비판하며 "유엔은 이번에도 특사를 통해 군부와 평화를 중재하려고 했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이러한 노력은 결코 의미있는 결과를 도출하지 못한다"라고 논평했다.
시민사회단체들의 성명에는 헤이저 특사의 행보에 대한 날선 비난이 담겼다. 단체들은 "현 유엔 특사는 미얀마 위기에 대처하는 역량이 부족하고 목표도 명확하지 않다"라며 "특사의 미얀마 방문이 유엔과 국제사회가 군부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형태로 비칠 수 있음에도 유엔 특사는 미얀마를 방문하기 전 민주진영과 시민사회와 어떠한 협의도 하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단체들은 특사의 미얀마행이 결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군부가 이번 유엔 특사의 미얀마 방문을 국제사회에서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조작과 선전의 재료로 삼을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우려대로 군부는 17일 어용언론과 친군부 지지자들의 소셜미디어 활동을 통해 '현 미얀마 정부'와 유엔특사가 공식적인 회담을 가졌다고 선전했다. 미소를 띄우고 악수를 나누는 군부 지도자 민 아웅 흘라잉과 놀린 헤이저 특사의 모습도 공개했다.
회담 당시 헤이저 특사의 드레스 코드도 비난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었다. 군부 지도자 민 아웅 흘라잉과 만났을 때 특사가 입은 녹색 치마가 미얀마 국민의 심기를 거스른 것이다. 미얀마 정계에서 녹색은 군부를 추종하는 미얀마의 보수정당인 연방단결발전당(Union Solidarity and Development Party)과 군부를 상징하는 색상이다.
미얀마 누리꾼들은 "치마색으로도 유엔이 누구의 편인지 알 수 있다", "특사는 민 아웅 흘라잉을 기쁘게 하기 위해 녹색 치마를 입은 것이냐?", "유엔 특사가 이를 드러내고 웃는 순간에도 미얀마 국민은 죽임을 당하고 있다"라고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헤이저 특사의 미얀마 방문은 성과 측면에서도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하지 못했다. 유엔은 성명에서 "특사가 미얀마의 악화하는 상황과 시급한 문제들에 초점을 맞출 것"이라고 미얀마 방문 목적을 설명했다. 특사도 미얀마를 방문하기 전 "가능한 빨리 아웅산 수지와 만날 기회를 갖고 싶다"라며 "수지 고문은 모든 관련 당사자들과의 대화에서 중요한 이해관계자"라고 밝혔다.
그러나 특사는 아웅산 수지 국가고문 접견에 관해 군부 측과 유의미한 협상을 이끌어내지 못했으며, 수감 중인 다른 정치범이나 소수민족 단체 등 주요 이해관계자를 만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정치범 석방, 초법적 사형집행 중단, 국내실향민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원 등 핵심 현안도 군부 지도자와의 회담에서 의제가 되지 못했다.
미얀마 방문이 효용성없이 군부에 선전거리만 제공했다는 비난 속에 헤이저 특사는 18일 성명을 통해 "유엔의 개입이 어떤 방식으로도 군정에 정당성을 주지 않는다"고 발표했지만 이미 미얀마의 민심은 싸늘해진 뒤였다.
계속되는 탄압, 유엔의 행동은 언제?
18일 최대도시 양곤 도심에서 유엔에 항의하기위해 시위에 나선 시민들은 "유엔이 행동에 나설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신이 더 필요한가?", "우리 미얀마 시민은 유엔을 몹시 우려한다"라고 적힌 현수막을 들고 행진했다.
시민사회단체들도 특사의 이번 미얀마 방문이 군부를 더욱 대담하게 만들 것이며, 유엔의 노력과 관계없이 군부는 계속해서 민간인을 대상으로 잔혹한 범죄를 저지를 것이라고 우려했다.
시민들의 외침과 시민사회단체의 걱정처럼 유엔 특사가 미얀마를 방문하던 시기에도 군부 군대는 자국민을 향한 폭력을 멈추지 않았다. 특사가 네피도에서 민 아웅 흘라잉을 만난 17일, 미얀마 동부 카레니(Karenni)주와 중부 마궤(Magway), 사가잉(Sagaing)주에서 군부 병력은 민간인 거주지에 공습과 방화를 자행했다.
특히 16일에는 사가잉주 인마삔 지역 인바웅따잉 마을에 군부가 무차별 헬리콥터 사격과 방화를 자행하며 민간인 30여 명이 사망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놀린 헤이저 유엔 미얀마 특사의 직무정지와 유엔 사무총장의 적극적 개입을 요구한 864개 시민사회단체들은 성명에서 "오는 9월 뉴욕에서 열리는 유엔 총회에서 유엔은 미얀마 사태와 관련한 책무성에 초점을 맞춰 논의와 결론을 이끌어내야 하며, 미얀마 국민의 바람과 요구를 반영하는 구체적인 조치가 뒤따라야 한다"는 바람을 유엔에 전했다.
이어 단체들은 "유엔 특사를 군부의 선전수단으로 전락시킨 유엔이 스스로 가한 이미지 손상을 회복해야 한다"라며 "미얀마 군부는 미얀마 국내법과 국제법의 정의에 따라 테러단체로 규정해야함이 마땅하고, 유엔은 유엔 헌장이 부여한 임무를 수행하여 테러단체인 미얀마 군부가 자행하는 폭력으로부터 미얀마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라고 촉구했다.
덧붙이는 글 | 필자 최진배는 페이스북 뉴스그룹이자 비영리단체인 '미얀마 투데이' 대표입니다(https://www.facebook.com/groups/1603092429887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