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기본법 거스르고, 예산낭비·시민불편 부른다"
29일 부산시청 앞에서 한글을 강조하는 행사가 열렸다. 전국의 70여 개 국어 단체, 부산 30여 개 시민단체 등 100여 개 단체가 부산시가 추진하는 영어 정책을 놓고 비판 목소리를 냈다.
112년 전인 1910년 같은 날 우리는 주권을 빼앗긴 채 국권을 잃었다. 국치일 이후 일제는 일본어 상용을 강제하며 조선어 말살 정책을 본격화했다. 이런 역사적 의미를 설명한 참가단체들은 "과거 역사의 악몽이 부산의 영어상용으로 되살아나고 있다"고 강도 높은 비난을 던졌다.
지난 3일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제기한 이대로 한글학회 부설 한말글문화협회 대표도 참가자 중 한 명이었다. 이 대표는 부산시가 영어상용도시를 본격화하자 반대의 뜻을 표시했다. 그는 "부산·경남 출신의 최현배, 김두봉 선생이 주시경 선생을 모시고 쓰러져가는 우리 말과 글을 지키며 국어독립운동을 펼쳤다"라며 "그런데 지금 부산시가 이에 역행하고 있다"라고 성토했다.
정부로부터 한글 발전의 공로로 '문화포장'을 받은 차재경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 회장 역시 생각이 같았다. 차 회장은 "부산을 비롯해 서울 등 전국의 단체가 여기에 모인 것은 사업 철회를 요구하기 위한 것"이라며 박형준 부산시장, 하윤수 부산교육감의 결단을 압박했다.
한글 관련 관계자들이 부산에 집결한 이유는 박형준 부산시장의 선거 공약이 현실화하면서다. 영어상용도시를 지방선거 공약으로 내놨던 박 시장은 지난 9일 하 교육감과 업무협약을 맺었다. 2030 부산세계박람회를 계기로 영어 사용에 불편함이 없는 도시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공문서 영어 병기, 시정 홍보 영문서비스 확대, 도로표지판·도로시설물 영문 표기화 등의 내용이 공개되면서 비난이 일었다.
"대한민국 전체의 언어 사용 환경을 어지럽히고 공공기관의 영어 남용을 부채질한다"며 공동성명을 낸 한글 단체들은 내부 논의를 거쳐 규탄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이번에는 부산시청으로 모였다. 시청 앞에서 열린 첫 항의방문이다.
영어상용도시 논란은 한글 단체뿐만 아닌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부산인권포럼, 부산참여연대, 부산흥사단, 부산민중연대 등 부산의 단체도 함께했다. 대표로 발언에 나선 김수우 부산작가회의 회장은 "우리가 물려받은 유산 중 가장 위대한 것이 한글"이라며 "국제화와 영어상용도시는 같은 길이 아니다. 외려 한글을 제대로 가꾸는 게 국제화의 지름길"이라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함께 채택한 성명을 통해서도 요구를 부산시에 전달했다. 이들은 "영어를 강요하는 것으론 세계박람회의 성공을 달성할 수 없다"라며 "이 정책은 부산의 문화정체성을 어지럽히고, 시민을 더 불편하게 만들 것"이라고 꼬집었다.
하지만, 부산시는 "도시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이유로 계속 추진을 시사해 논란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시는 이날 언론과 만나 "영어상용도시는 공용도시와 다르다"라며 "모든 문서와 소통을 영어로 하자는 것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이어 "시민의 관심과 우려를 잘 알고 있다"라며 "의무가 아니라 영어를 많은 시민이 쉽게 쓸 수 있는 환경을 넓히는 방향으로 갈 것"이라고 밝혔다. 앞서 '문체부 제동' 관련 보도에는 "공문서 영어서비스의 경우 투자유치과, 외교통상과 등 시청 내 해외 관련 제한된 부서에 국한 예정으로 이는 국어기본법을 위반한 게 아니라는 답변을 문체부로부터 받았다"라고 해명했다.
시가 신중한 검토를 강조하며 공개한 구체적 계획 수립은 올해 안이다. 그러나 한글 단체는 추가 대응을 예고했다. 김명진 한글문화연대 부대표는 "공문서 병기 등은 제한해 사용하겠다던데 상용도시를 표방한다니 뭔가 앞뒤가 안 맞다"라며 "이대로 강행한다면 관련 조직을 꾸리고, 반대운동을 전국으로 확대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행사를 마치고 추가 논의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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