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영웅은 삶 속에 숨어있다. 어디선가 뛰쳐나와 누군가의 생명을, 삶을 구한다. 이들은 어떻게 위기의 순간 용기를 낼수 있었을까. 무엇이 이들의 손을 내밀게 했을까. 시민 영웅의 '본심'을 들어본다.[편집자말] |
주말 밤 10시, 찌르는 듯한 비명이 아파트에 울려댔다. 가족들과 TV를 보며 하루를 마무리하던 평화가 삽시간에 깨졌다. 한 번 들렸을 땐 '누가 다투나 보다' 했다. 두 번째 들렸을 땐 '보통 일이 아니구나' 싶었다. 아파트 저층에 살고 있던 정구관(41)씨의 부인이 먼저 문을 열어봤다.
"여보, 도와줘야 할 거 같아."
부인의 다급한 목소리에 정구관씨는 소리의 진원지를 찾았다. 두 세대씩 마주보고 있는 계단식 아파트, 소리는 위쪽에서 들려왔다. 어둑했지만, 반층 위 계단에서 한 남성이 누군가의 목을 조르고 있는 듯 보였다. 정씨는 일단 제지하러 다가갔다. 훅,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여성분이 소리를 지르니까 입을 막으려고 한 거 같더라고요. 남성을 저지했는데 그제야 칼이 보였어요. 일단 칼부터 뺏어야겠다 싶어서, 필사적으로 막았죠." - 정구관씨
그 비명소리를 김호성(43, 가명)씨도 들었다. 그날 밤, 같은 라인 1층에 사는 지인 집을 방문했던 김씨는 "처음에는 여자 아이가 앙칼진 소리를 내는 거 같아서" 올라가봤다. 현장에 가까이 갔을 때는, 바닥이 온통 피였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마스크가 모두 젖을 정도로 흥건했다.
김씨가 처음 목격한 건 정구관씨와 가해 남성의 모습이었다. 정씨가 가해 남성의 팔을 잡고 늘어지고 있었고, 가해자는 계속 피해자를 가격하고 있었다. 여기에 김씨도 힘을 보탰다. 성인 남성 두 명이 나서서 제지하자 가해자도 포기한 듯 보였다. 가해자를 거의 거꾸로 들다시피 제압해 반 층 아래로 내려왔다. 옆에 떨어져 있던 칼도 치웠다. 그렇게 일단락 된 줄로만 알았다.
1시간처럼 길었던 10분이 흐르고 경찰이 도착했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네 잘못이야. 난 감옥 갈 거고, 넌 잘 살아라."
반 층 아래로 끌려 내려온 가해자는 넋이 나간 듯 계속 중얼거렸다고 한다. 그러고 얼마가 지났을까. 가해자는 "앉아서 기대 있겠다"고 말했고 이미 기력을 소진한 것으로 판단해 그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아직 경찰이 도착하지 않았다. '신고가 제대로 된 걸까' 김씨는 가해자를 자극할까봐 1층으로 내려가 112에 재차 신고를 했다. "빨리 경찰이든 119든 왔으면 하는 생각 뿐"이었다. 그런데 또 비명이 들렸다.
"가해자가 갑자기 뛰어 올라가더라고요. 손에 칼날이 들려 있었어요. 부서진 칼날을 바닥에서 주운 것 같더라고요. 그때도 처음엔 칼로 찌르고 있는지 몰랐어요. 다시 뛰쳐올라가서 막고 보니 부러진 칼날로 여성분을 찌르는 거였더라고요. 정말 죽일 듯이... 제가 왼쪽 팔이 안 좋아서 힘에 부치니까 와이프도 쫓아 올라와서 '도와달라'고 소리치면서 가해자 머리를 잡고 끌어당기고 있는데 1층에서 다시 그 분(김호성씨)이 올라왔어요." - 정구관씨
정씨와 가해자가 또다시 엉켜 있었다. 정씨는 온 힘을 다해 가해자의 팔을 막았다. 가해자 손에 들려있던 칼날을 뺏은 건 김씨였다. 가해자는 칼을 손에 꼭 쥐고 끝까지 놓으려 하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하나를 일일이 펴서 겨우 칼날을 떨어트렸다. 가해자를 아예 바닥에 눕힌 채 눌렀다.
얼마 후 드디어, 경찰이 도착했다. 1시간처럼 느껴졌던 10여 분이 흐른 후였다.
경찰 조사 결과, 24살의 가해자는 20살의 피해자가 "만나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흉기를 휘둘렀다고 한다. 지난 7월 16일 밤 가해자는 피해자의 귀가를 기다렸고 "잠깐 얘기 좀 하자"며 아파트로 따라 들어간 뒤 범행을 저질렀다. 경찰 조사에서 가해자는 "찌르긴 했지만 죽일 의사는 없었다. 흉기도 우연치 않게 소지했을 뿐"이라고 진술했다. 가해자는 살인 미수 혐의로 구속된 상태다.
사건 발생 후, 미묘하게 달라진 일상들
사건 발생 후 한 달여가 지났다. 가해자는 잡혔고 피해자는 부상에서 회복했다. 정씨와 김씨 모두 매일 꼬박꼬박 출근하는, 전과 다를 바 없는 하루를 지내고 있다. 그러나 일상은 미묘하게 달라졌다고 한다.
정씨의 부인은 아직도 계단을 보면 힘들어 한다. "그 상황을 떠올리기 싫어하고, 계단만 봐도 트라우마 증상을 보인다"고 했다.
김씨는 가해자의 보복이 걱정된다고 했다. "가해자는 풀려날 텐데 보복 위험도 있지 않냐"는 주변의 우려에 납득이 가, 인터뷰도 고사하려 했다.
물론 긍정적인 변화도 있다. 두 사람은 포스코청암재단의 '포스코히어로즈'에 선정됐다. 포스코히어로즈펠로십은 국가와 사회정의를 위해 살신성인의 자세로 자신을 희생한 의인이나 의인의 자녀가 안정적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업이다. 난생처음 '영웅'이 돼 아이 이름으로 장학금을 받았다.
정구관씨에게는 6살 난 아들이, 김호성씨에게는 4살 난 딸이 있다. 두 아이들은 아직 아빠의 그날 일을 알지 못하지만, 알게 될 날이 올 터다. 정구관씨는 아들을 떠올리며 동시에 피해자를 걱정했다.
"저희도 아이가 있는데 그분도 나이가 어리신 거 같아서... 저희도 이렇게 힘든데 피해 당하신 분은 정신적으로 얼마나 힘드실지 걱정돼요. 치료 받고 빨리 회복하셨으면 좋겠어요. 그게 지금의 바람이에요."
"그런 일을 또 목격한다면, 뛰어들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이들에게 '왜'를 물었다. 무엇이 이들에게 용기를 내게 했을까. 두 사람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처음부터 칼을 들고 있는 줄 알았으면, 선뜻 몸싸움 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주먹으로 때리는 줄 알고 힘으로 끌어내린 거죠. 제압하고 보니까 칼날이 휘어있더라고요. (가해자가)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휘두르기만 해도 다칠 수 있었을 텐데 그때는 그런 생각이 아예 안 들었어요. (저보다도) 정구관님이 정말 대단하신 게, 정말 필사적으로 가해자를 잡고 계셨어요. 집 바로 앞에서 벌어진 일인데 그렇게 나설 수 있다는 게, 그게 정말 대단한 거 같아요." - 김호성씨
김씨는 정씨에게 공을 돌렸다. 정씨는 처음부터 "도와줘야 할 거 같아"라고 말한 부인에게 공을 돌렸다.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제가 나서고 그러는 성향이 아닌데... 와이프도 힘에 부치는데 어떻게든 여자분을 살리려고 가해자 머리를 잡아 당기는 걸 보고 저도 힘을 내지 않았을까요. 어떤 마음이 들었다기 보다, 까딱하면 한 생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이라 말려야겠다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 정구관씨
엉겹결에 휘말린 사건이었다. 칼이 있는 줄 모르고 덤빈 것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목숨이 위험할 뻔 했지만, 그 날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진 않는다고 했다.
"그래도, 돌이켜 보면... 그 때 그렇게 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 생명을 구한 거니까요." - 정구관씨
"이런 말하면 가족들에게 등짝 맞겠지만, 그런 일을 눈 앞에서 본다면 또 뛰어들지 않을까요." - 김호성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