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을 모르고 오르는 물가에, 역대 최강이라는 태풍 '힌남노'의 북상까지. 풍성하고 즐거운 한가위라는데,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2022 추석 풍경을 살펴봅니다. [편집자말] |
새삼 어른이 됐다고 느낄 때가 있다. 명절에 부모님께 용돈을 드릴 때라든지, 회사에서 받은 명절 선물을 들고 집에 돌아갈 때라든지, 쉬는 날로 손꼽아 기다렸던 명절이 이젠 가장 업무가 많은(산업 특성상) 시즌이라 좋기만 한 것은 아니라든지 등. 책임감과 삶의 무게를 지고 있음을 스스로가 느낄 때 나도 어른이 됐구나 싶다.
받고 싶은 추석 선물은?
회사에서 주는 추석 선물세트 하면 스팸과 참치캔 세트가 대표적이다. 판매량 기준으로는 참치캔과 스팸 세트가 부동의 1, 2위다. 자녀가 있는 맞벌이 부부와 1인 자취 가구에게 유용한 선물인 데다 가성비까지 있어 오랜 기간 명절 선물세트를 대표하고 있다.
그렇다면 직장인들이 회사에서 받고 싶어 하는 추석 선물은 무엇일까? 주변 직장인들에게 자체 설문을 돌려본 결과 '현금'이 가장 큰 선호를 보였다. '머니 머니 해도 돈이 좋다'는 말이 있듯이 많은 직장인들은 호불호를 타지 않는 현금 또는 상품권·복지포인트를 선호한다.
명절 선물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 실용성과 가격인 점을 봐도, 누구에게나 돈은 실용적이니 가장 선호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또한 개인간 선물이었다면 준 사람의 성의가 중요하겠지만 회사가 전 임직원에게 주는 추석 선물은 그 진실성과 성의보다는 가격과 실용성이 중요하다.
우리 회사도 현금성 포인트를 추석 선물로 준다. 평소 사고 싶었던 상품을 살 수 있는 기회다(결국 내수경제 촉진).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명절 선물로 돈 또는 상품권, 복지포인트를 받으면 현물을 받았을 때보다 그 고마움과 즐거움이 짧게 유지되는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명절 선물로 받은 현금은 계좌에 들어가면 출처가 희석돼 버리고, 상품권의 경우도 고가의 물건을 살 때 비용의 일부를 충당하는 경우가 많아 할인쿠폰을 쓴 느낌 또는 나의 지출로 느끼기 쉽다. 추석 선물을 받은 느낌이 빨리 휘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가 명절 선물을 준다면 내게 소비의 선택지를 주는 돈이 좋다.
내가 받은 최고의 추석 선물
명절 선물 트렌드는 한국 근현대사와 함께 변했다. 6.25 전쟁 직후의 가난한 시절에는 서로 쌀이나 달걀을 주고받았고, 1960년대 생필품이 부족하던 때는 설탕, 비누, 밀가루 등 생필품들을 나눴다. 산업화 시기인 1970년대는 삶에 여유가 조금 생기자 기호품으로 품목이 다양화됐고, 1980년대부터는 지금과 같은 통조림 햄 세트, 한우갈비 세트, 과일 세트 등이 대표적인 명절 선물세트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올해의 명절 선물 트렌드는 가성비 vs. 프리미엄의 양자 구도다. 고물가의 영향과 엔데믹으로 인한 보복 소비가 만들어낸 현상이다. 게다가 대형마트나 백화점뿐 아니라 다양한 유통채널이 생기면서 대기업 브랜드 상품이 아니더라도 후기가 좋은 산지직송 특산물과 프리미엄 수제 상품들이 명절 선물 시장에서 점유율을 키우고 있다.
이처럼 경제 상황에 따라 인기 있는 상품군은 계속 달라지고 다양해졌지만 선물을 주고받는 문화는 계속되어 왔다. 시대가 바뀌어도 불변하는 것이 본질에 가깝다면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의 명절 선물 문화의 본질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받은 최고의 추석 선물은 '곶감세트'다. 인턴으로 들어간 회사에서 근무한 지 두 달이 채 안 된 상황이었다. 추석이 돼 임직원에게 백화점 곶감세트를 나눠주던 그 회사는 인턴들에게도 똑같이 추석 선물을 줬다.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을 받았기에 그 감동이 더 크게 다가왔고 임시직이었지만 회사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은 느낌이었다.
곶감세트를 들고 집으로 돌아올 때 느꼈던 그 기쁨과 사회인이 됐다는 뿌듯함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재직 중인 회사에서 몇 년째 명절 선물을 받다 보니 지금은 명절 선물이 고마움보다는 당연함으로 여겨지는 부분도 없지않아 있지만, 선물의 가격에 상관없이 챙김을 받는다는 그 느낌이 따뜻했다.
추석 선물이란 무엇인가
초등학생 때 명절을 손꼽아 기다렸던 가장 큰 이유는 연휴로 길게 학교를 안 가서였지만, 명절 선물로 집에 먹을 것이 넘쳐났기 때문인 이유도 있다. 가공식품부터 신선식품까지, 부모님께서 회사와 지인들로부터 받은 많은 명절 선물 세트들이 집 안에 쌓여 있던 장면이 기억난다.
그 시절 추석 때 받은 참치 통조림과 통조림 햄이 식료품 보관장(일종의 팬트리)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어린 나는 부자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한편 '엄마·아빠가 사회에서 인정을 받고 있구나' '많은 사람들과 잘 지내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선물의 사회적 의미를 연구한 논문들이 있듯이 직장에서 주는 추석 선물은 단순히 먹는 것, 쓰는 것의 꾸러미가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사회의 일부가 돼 살아가고 있음을 의미하며 어느 조직의 일원으로 소속돼 존재의 가치를 인정 받음을 의미한다.
회사에서 준 명절 선물을 들고 귀가하는 직장인의 표정을 본 적이 있는가? 그 뿌듯한 표정은 어쩌면 선물 그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회사로부터의 소속감과 사회적 인정, 그리고 고된 노동에 대한 작은 보람을 얻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비슷한 맥락으로, 우리가 개인적으로 나누는 추석 선물도 선물 자체의 가격이나 실용성이 1차적으로 전달되겠지만 2차적으로 선물을 받는 사람이 느끼는 건 본인이 이 사회와 관계 맺고 있음에 대한 안도감과 뿌듯함, 보람일 것이다.
'안 주고 안 받으면 가장 속 편하다'는 의견에 많은 이들이 공감한다. 추석 선물을 주고받는 행위는 경제적 제로섬(zero-sum)일 수 있다. 선물을 받으면 고마움과 동시에 나 역시 비슷한 정성으로 답례를 해야 한다는 부담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 동물인 사람에게 선물을 주고받는 행위는 사회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안도감 같은 정서적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니 완벽한 제로섬은 아닐 것이다.
꼭 물질적인 것일 필요는 없다. 상대가 사회와 연결돼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게 관심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그렇기에 진심이 담긴 고마움과 안부 인사만으로도 충분하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당신의 인사가 누군가에게는 큰 안도감을 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