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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哀-제주4.3 4.3 트라우마센터 프로그램에서 그린 그림
인생 哀-제주4.34.3 트라우마센터 프로그램에서 그린 그림 ⓒ 김순애
 인생 哀-제주 4.3
어머님이 아파서 돌아가시는 그 광경이
머리에 떠올라서 표현해 봤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큰언니하고 밑에 오빠 또 아버지 그리고
막내동생 잃어버리고
친정으로는 외삼촌 4형제가 몰살되고 거기에 외할머니까지
어머니는 가슴에 맺힌 한 때문에 계속 한숨만 쉬시고
음식도 못 드시고 밭에 일하러 가도 전혀 못 하고
밭고랑에 누워서만 있다고 오고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때부터는 배가 막 차차 불러 오릅디다
결국 고통만 받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저예요
돌아가시는 걸 옆에서 보면서 그저 눈물만 뚝뚝 흘리고
당시에는 전기가 없어서 각짓불 불은 붙여놨지만
그래도 밤은 어두침침했습니다

동네 땅부자, 청집 삼촌 딸 영신언니

영신언니는 동네에서 많은 땅을 가진 청집 삼촌의 딸이었다. 벌을 키우고 있어 영신언니네 집은 '청집'이라고 불리웠고(청은 제주 사투리로 꿀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영신언니 아빠를 청집 삼촌이라고 불렀다.

처음부터 청집 삼촌이 부자였던 것은 아니다. 4.3으로 제주도는 피폐해졌고 많은 이들이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본 밀항선을 탔다. 당시 청집 삼촌의 누이 넷도 일본으로 갔고 일본에서 악착같이 돈을 벌어서 청집 삼촌에게 보내주었다. 청집 삼촌은 돈을 받을 때마다 당시 싸게 나온 동네 밭들을 샀고 본인도 알뜰하게 재산을 모아가면서 동네 주변의 많은 밭을 가지게 된 것이다.

영신 언니에게는 장애가 있는 여동생 둘이 있었다. 한 동생은 무슨 병을 앓고 있었는지 거의 걷지를 못했고 한 동생은 나이에 비해 발달이 더딘 편이었다. 많은 밭에 농사를 짓게 되면 일꾼들을 챙겨야 하는데 언니의 엄마는 두 동생을 돌보느라 다른 일을 하지 못했다.

영신 언니는 나와 다르게 학교에 적을 두고 있었지만 동생들을 돌보느라 경황이 없는 엄마를 대신해서 밭일을 하러 다녀야 했기에 학교에 갈 틈이 없었다. 청집 삼촌이 일꾼을 사서 밭일을 하는 날이면 영신언니도 같이 일을 해야 했다. 보리씨를 뿌리면 바로 다음 날부터 김매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풀이 올라오면 또 뽑고, 뽑고, 김매는 일의 연속이었다.

그 당시에는 농약도 없고 농기계도 없었기에 농사는 모두 손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 청집 삼촌은 주로 동네 사람들에게 의존하여 농사를 지었다. 청집 삼촌네 벌통을 산으로 옮기는 일도 동네사람들이 일당을 받고 했다. 4.3 직후 동네에는 일손이 귀했다. 동네 사람들이 일을 하는 날이면 주로 언니 할머니가 일꾼들 밥을 준비했고 큰 딸인 영신언니는 할머니를 도와 밥을 준비하고 밭일을 함께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어른들 틈에 끼어 동네 아이들도 자주 영신언니네 밭에 가서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영신 언니가 우리를 진두지휘했다. 영신언니네 밭에서 일을 하면 청집 삼촌은 100원과 10원 짜리로 우리에게 일당을 주었고 그러면 나는 그 돈으로 집에 필요한 것을 사곤 했다.

아픈 여동생들을 돌보느라 집안일에 소홀할 수밖에 없던 엄마를 대신해서 일해야 했던 영신 언니는 어려서부터 빨리 철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영신언니와 나 둘 다 집안의 큰딸로 어른 역할을 하며 고생했던 경험을 나눠가져서인지 우리 둘의 사이는 다른 또래들보다 더 돈독했다.

나보다 세 살 위인 영신 언니는 열일곱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이씨 성을 가진 제주 사람과 결혼했다. 하지만 사업을 하던 남편은 사고로 다치고 큰 병치레를 하게 되면서 언니의 삶도 완전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남편 병구완하랴 자식들 돌보랴 삶의 풍파를 겪은 언니는 원래도 당찬 성격이었는데 일본 생활을 하면서 더 강단이 생겼다.

일 년에 한 번씩은 제주에 계신 아버지 생신 때마다 식구들을 만나러 제주를 방문했던 언니는 그때마다 잊지 않고 나를 만났다. 영신언니는 일본에서 40년을 살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자식들 모두 안정적인 삶을 살게 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10대 때보다 더 단단한 마음을 가지고 돌아온 언니는 80대 중반인데도 여전히 대범하면서도 활력 있는 삶을 살고 있고 나와는 지금도 언니, 동생으로 서로 의지하며 친자매 이상의 우애를 나누고 있다.
 
1950년 제주 산지천의 빨래 풍경 .
1950년 제주 산지천의 빨래 풍경. ⓒ 제주특별자치도
   
동네 동갑내기 의옥과 동네 오빠들

나의 남편 김의옥은 같은 동네에서 자란 동갑내기였다. 하지만 동네에서 서로 어울려 친하게 지낸 사이가 아니었고 기억을 되살려보아도 10대 때 같이 놀아본 기억이 없다. 의옥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듣긴 했는데 대부분 여자 아이들이 놀고 있으면 신발 숨기는 등의 장난스러운 행동에 대한 것이었다. 의옥은 아이들 사이에서 꽤 장난꾸러기라는 평판을 가지고 있었다.

나와 내 친구들은 동갑내기 남자아이들보다는 오빠의 친구들과 잘 어울렸다. 동네에는 학교에 다니지 않던 오빠들이 많았는데 겨울이면 누구네 집 방에 둥그렇게 둘러앉아 이불 밑으로 발을 집어넣고 말장난을 하며 놀았다. 그 당시 추억 중 기억나는 것은 삶은 계란 먹기 내기를 하던 날이었다.

오빠들이 돈을 모아서 달걀을 사 왔고, 그것을 삶아서 누가 많이 먹나 내기를 했다. 그때 어떤 오빠가 무리를 해서 스무 개 이상을 꾸역꾸역 먹는 바람에 결국 토하고 말았다. 또 어떤 날은 좁쌀을 모아서 방아에서 빻은 후 오메기떡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참외밭에서 참외를 서리해서 먹기도 했다.

난리 후라서 어른들은 모두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 온 힘을 기울이느라 자식들의 교육에 세세하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래서 다 큰 여자애들과 남자애들이 같이 한 방에서 놀아도 누구 하나 제대로 들여다보고 야단치는 어른들이 없었다. 우리도 오빠들에 대해 이성적인 감정도 없이 그저 한 덩어리로 어울려서 친구처럼 놀았다.

열여덟, 돈을 벌기 위해 육지로 나왔다

동네에서 그렇게 정신없이 일하고 배우고 노는 사이 어느새 열여덟이 되었다. 마침 육지에서 일하다가 몸이 아파서 고향으로 내려온 동네 언니가 있었는데 육지에 가면 일자리를 구할 수 있으니 같이 올라가자고 나에게 권유했다. 아무리 농사짓고 나무를 해다 팔아도 어려운 살림은 나아지지 않았기에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보리쌀 서너 말을 챙긴 나는 그 언니를 따라 방직공장이 많이 있던 안양으로 갔다. 하지만 이미 전국에서 수많은 처녀 총각들이 일자리를 구하러 수도권으로 몰려들고 있었고 안양에도 일자리를 구하러 지방에서 올라온 이들이 많았다. 공장에 들어가는 것은 제주에서 보리쌀을 싸들고 떠났을 때 마음만큼 순조롭지 않았다.

제주에서 가지고 간 보리쌀은 바닥을 보이고 있는데 공장 일자리는 쉽사리 구해지지 않았다. 보리쌀이 다 떨어지자 배를 곯지 않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급한 대로 남의 집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다. 낯선 집에 들어가 그 집 식구들 밥을 하려는데 어찌나 설움이 복받치던지 막 눈물이 나왔다.

하루는 노량진에 있는 학원에서 일한다는 동네 삼촌을 만나게 되었다. 그 삼촌은 나에게 살 곳을 마련해줄 테니 학원에 와서 심부름을 하면 어떠겠냐 물었고 나는 바로 간다고 하였다. 동네 삼촌을 따라가 머물게 된 집은 한강이 바로 보이는 산 중턱에 있는 기와집이었다. 내가 심부름하게 될 학원은 그 집의 주인 할머니가 정부 보조금을 받으며 정규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교육과정을 개설한 학원이었다.

지금 그 시기를 떠올릴 때 가장 후회되는 것은 그 학원에서 심부름을 하면서 공부하겠다는 마음을 먹지 못한 것이다. 그 당시에는 당장 눈앞의 생활을 해결하는 데 급급했고 어려운 집안 형편에 대한 생각에 짓눌려 하루라도 빨리 돈을 벌고 싶었다. 그래서 방직공장에 취직하려고만 애썼지 더 길고 넓게 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곳에서 공부에 욕심을 두고 학교를 다녔다면 지금 내 인생은 다르게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학원 근처에는 방직공장이 있었는데 해가 기울어 주변에 서서히 어둠이 깔릴 무렵이면 공장 여공들이 하나둘 퇴근하는 모습이 보였고 공장에서는 퇴근 시간에 맞춰 음악소리가 흘러나왔다. 공장 취직에 골몰했던 나는 흘러나오는 음악소리를 들으며 나는 언제쯤이면 저 공장에 들어가서 일을 하고 돈을 벌 수 있을까 생각에 잠겼고 그러다 내 처지가 다시 서러워져 어느새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대한뉴스 제 95호 - 태창 방직공장을 찾아서 (1956년 10월) 화면갈무리
대한뉴스 제 95호 - 태창 방직공장을 찾아서 (1956년 10월)화면갈무리 ⓒ KTV 국민방송
 
파란만장 서울과 안양살이

결국 나는 내가 간절히 원하던 공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기술도 경험도 없었기에 처음 들어간 곳은 대방동에 있는 개인 방직회사였다. 거기에 몇 달 다니다 다른 공장에서 사람을 뽑는다고 하니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한 지인에게 돈을 주면서까지 알선을 부탁해서 다른 공장으로 간신히 들어갔다. 미천한 경력이나마 밑천을 삼아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월급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를 육지에 오도록 한 동네 언니가 누군가와 돈 문제로 심하게 다투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언니는 나를 보자 갑자기 내 도장을 가져다 달라고 했고 나는 동네 언니를 믿고 순진하게 도장을 가져다주었다. 언니는 다투던 사람에게 그 도장을 내밀었고 어딘가에 도장이 찍혔다. 그런데 내가 첫 월급을 타던 날 바로 그 사람이 공장 정문 앞에서 버티고 있다가 나의 첫 월급봉투를 송두리째 가져가 버렸다. 어리석게 내가 도장을 내준 탓이었다. 월급봉투를 뺏겨 버린 나는 다시 빈털터리가 되었다.

빈털터리 몸으로 나는 동네 친구인 문자와 당시로서는 꽤 규모가 있는 영등포 태창방직으로 이직했다. 태창방직에서 몇 달 다니며 일에 꽤 익숙해지자 다시 더 나은 조건으로 사람을 뽑는 다른 공장을 곁눈질하며 찾아보았다.

초보자와 기술자의 임금 차이가 꽤 큰 편이어서 태창방직에서 받는 돈으로 생활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마침 당시 태창방직만큼이나 규모가 있는 금성방직에서 사람을 뽑는다고 해서 지원했는데 운 좋게 합격했다. 금성방직은 안양에 있어서 나는 안양으로 옮겼는데 제주도에서 올라온 언니 동생들 여럿이서 같이 생활할 수 있었다.

열아홉, 엄마의 죽음

금성 방직에서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기계를 돌릴만하게 되니 제주에 계신 어머니가 많이 편찮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육지에서 1년 반 정도 생활하면서 공장 일에도 익숙해지고 어느 정도 안정을 찾고 있었지만 오빠는 곧 군 입대를 앞두고 있고 내가 가서 다시 맏딸 역할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부랴부랴 공장을 그만 두고 제주에 내려왔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한의원에 가보았지만 딱히 병명을 들을 수 없었다. 어찌할 바도 모른 체 집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병간호를 했다. 죽음에 임박한 어머니의 배는 계속 부풀어 올랐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 위나 간 쪽이 나빴던 것이 아닐까 싶다.

오빠는 내가 제주로 내려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군에 입대를 했고 오빠 군 입대 후 결국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는 숨을 거두었다. 병원에도 제대로 모시고 가지 못하고 병명도 모른 상태로 어머니를 보냈을 때 내 나이 열아홉이었다.
   
4.3 때 오빠들과 남동생들, 어머니, 자식 셋을 잃고 반송장처럼 살아왔던 어머니가 이 세상을 떠나자 지난 10년의 시간들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무엇에 체한 것처럼 늘 속이 아프셨고 잘 드시지도 못했던 어머니. 갸름한 얼굴에 키가 컸던 어머니는 속에 맺힌 한을 가끔씩 나에게 푸시는 듯 나의 작은 실수에도 욕을 바가지로 했었다. 그럴 때마다 나의 마음도 불쑥불쑥 화가 났다.

자식들이 넷이나 있는데도 늘 축 늘어져만 있던 어머니, 죽을힘을 다해 기운을 내주길 바랐지만 대부분 넋이 빠진 듯 집안일을 등한시했던 어머니, 아직 친구들과 한참 놀아야 할 나이에 종종 물을 길어오다 친구들과 장난하다 허벅('물허벅'의 방언)이라도 깨는 날에는 큰 사달이라도 난 듯 나를 향해 욕을 퍼부었던 어머니.

어머니와의 기억을 지우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10년 내내 어머니 가슴속에 응어리졌던 그 한에 대해 떠올리는 시간들이 나에게도 찾아왔다. 나도 다섯 자식을 낳았다. 나에게 어머니와 비슷한 일이 생겼다면 나는 어땠을까? 삶을 제대로 이어갈 수 있었을까?

#4.3#방직공장#엄마#여공#방직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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