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1392년 격동의 시기. 성리학을 중심으로 의기투합한 신진 사대부, 이른바 급진 개혁파들은 변방에서 소외받던 신군부 무장세력의 등에 올라타 무능한 고려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 '조선(朝鮮)'을 건국했다.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려와 달리 유교를 국가의 근본 이념으로 정한 조선은 새로운 나라를 이끌어갈 유능한 인재 양성에 박차를 가했다. 새 왕조는 기력이 쇠퇴한 고려의 5백 년 도읍지 개경을 떠나 한양으로 수도를 천도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교육제도를 정비했다.
성리학을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채택한 조선은 공립에 해당하는 관학(官學)으로 중앙(한양)에 최상위 고등교육기관인 '성균관(成均館)'을 두었다. 성균관은 오늘날의 국립대학에 해당한다.
중등교육은 '4부 학당(四部學堂)'이 담당했다. 고려의 5부 학당을 계승한 4부 학당은 한양의 중앙에 중학(中學), 동쪽에 동학(東學), 서쪽에 서학(西學), 남쪽에 남학(南學)을 세웠다. 4부 학당은 성균관과 시스템을 서로 공유하는 부속학교였다.
지방에는 부·목·군·현마다 법령에 따라 설치된 중등교육기관인 '향교(鄕校)'가 있었다. 향교는 지금의 공립 중·고등학교에 해당한다. 현재도 전국에는 약 230여 곳의 향교가 남아 유교 교육과 각종 인문학 강좌의 요람 역할을 하고 있다.
사립 교육기관으로는 중등교육을 담당한 '서원(書院)'과 초등교육을 맡았던 '서당(書堂)'이 있었다. 서원은 지방의 명망 있는 유림들이 성리학의 이념을 교육하고 '제향과 후학 양성'을 목적으로 그들이 존경하는 스승과 선현들의 연고지에 세운 사설 교육기관이다. 오늘날의 사립 중·고등학교다.
2019년 7월 유네스코에서는 한국의 서원 9곳을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가 있다고 인정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바 있다.
광주의 대표 인문학 여행지 '광주향교'
고려시대의 '향학(鄕學)' 제도에서 출발한 향교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적극적인 유교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며 새 왕조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했다. 태조 이성계는 '향교 설치령'을 내리고 1읍에 1교를 세우도록 했다.
태종 때는 국가에서 땅과 노비와 교육에 필요한 서적을 하사하며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또한 지방수령의 인사고과에 향교의 운영과 관리 능력을 중요한 항목으로 반영했다.
광주광역시 남구 구동 광주공원 남쪽 끝자락에 여러 채의 기와집들이 서로 어깨동무하듯 푸르름 속에 포근히 안겨 있다. 아파트 숲으로 둘러싸인 도심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이색적 풍경이라 유독 눈에 띈다.
바람은 점차 소슬해지고 가을빛이 완연해가는 지난 8일 광주의 대표 인문학 여행지 '광주향교'를 찾았다. 600년 전통을 자랑하는 광주향교의 배롱나무는 붉디붉었던 여름을 떠나보내며 성글어가고 있다. 외삼문 옆 은행나무도 곧 노란 가을 옷으로 갈아입을 채비를 하고 있다. 초가을 햇살이 고즈넉하게 내리는 광주향교가 이곳에 자리를 잡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련과 노고를 겪었을까.
최초의 광주향교는 조선 건국 7년째 되는 1398년(태조 7년)에 무등산 장원봉 아래에 세워졌다. 장원봉은 지금의 조선대학교 뒤쪽에 우뚝 솟아있는 봉우리다. 광주향교 학생들 중 과거시험에서 장원 급제한 사람이 많이 나와 '장원봉(壯元峯)'이라 했다고 '동국여지승람'은 전하고 있다. 그때부터 '실력광주'의 전통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지 않나 싶다.
장원봉. 터는 좋았으나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 학생들의 피해가 많았다. 다시 광주읍성 안으로 옮겼다. 하지만 이곳 역시 터가 낮아 비가 오면 물에 잠겼다. 1448년(성종 19년)에 현감 권수평이 현재의 위치인 광주공원 자락으로 이전했다.
호남을 쑥대밭으로 만든 정유재란 때 왜적들에 의해 잿더미가 됐으나 백성들이 협력해 다시 세웠다. 이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은 향교에는 누가 입학했고 무엇을 배웠을까.
기본적으로 향교에 입학하려면 초등교육 과정인 서당교육을 받은 16세부터 40세까지 평민 이상의 자제들은 누구나 시험과 추천을 받아 입학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여성에게는 담이 높은 '금녀의 집'이었다. 입학 정원은 50~90명 정도였으니 입시 경쟁은 지금보다 치열했을 것이다.
전액 국비로 운영했기 때문에 입학만 하면 무료로 공부하며 기숙사 생활도 할 수 있었다. 병역도 면제받았다. 조선 후기에는 향교가 군역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교과 과정을 보면 유교의 기본 이념인 '소학(小學)'을 마친 후에 유교의 경전인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등의 '사서(四書)'와 역경(易經), 서경(書經), 시경(詩經), 예기(禮記), 춘추(春秋) 등 '오경(五經)'을 배웠다.
향교에서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소과'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고 합격하면 '생원(生員)'이나 '진사(進士)'가 되어 지방의 하급관리가 되거나 한양의 성균관에 입학해 문과시험을 거쳐 중앙정치에 진출할 수 있었다.
지방 향교를 졸업한 수재들은 한양의 성균관으로 모여들었다. 조선 중기 호남을 대표하는 선비 제봉 고경명,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금호 임형수 등 이들 역시 모두 성균관 출신들이다. 지금으로 보면 국립 서울대학교 동문들이다.
모두들 말에서 내리시오
관학 교육기관인 향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공부하는 '강학 공간'과 성현들의 제사를 지내는 '제향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광주향교는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학교의 기능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지금은 제향의 기능과 시민들을 위한 인문학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비록 학교로서의 기능은 상실했지만 광주향교는 동학농민운동 이후 제일 먼저 불의에 맞서 항일 의병을 일으켰다. 장성 출신 기우만(1846~1916) 의병장을 중심으로 수백 명의 유생들이 광주향교를 본부로 삼고 결사 항전했다. 광주공원에는 향교에서 의병 활동을 하다 순국한 의병장 심남일의 순절비가 세워져 있다.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광주의 국립 중·고등학교는 어떻게 생겼고 어떤 시설들이 있을까. 향교는 서원과 달리 국가에서 세운 국립 교육기관이기 때문에 전국의 어느 향교나 거의 비슷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다만 뱡향과 지형에 따라 공간의 구성이 달라진다.
평지에 세워진 향교라면 전면에 제향의 공간을 두고 후면에 강학 공간을 두는 이른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 형태를 취한다. 경사진 터일 경우 높은 뒤쪽에 제향 공간을 두고 낮은 앞쪽에 강학의 공간을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형태를 취한다. 이는 강학의 공간보다 제향의 공간에 더 높은 위상을 갖게 하기 위함이다. 경사진 곳에 세워진 광주향교는 전학후묘의 공간 구성이다.
향교 정문 앞에 서면 맨 먼저 '하마비(下馬碑)'를 마주한다. 하마비는 이곳이 공자님을 비롯한 성현들이 계신 신성한 곳이니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고 걸어 들어오라는 의미다. 하마비 옆에는 향교의 건립과 중수를 기념하는 비석을 모아놓은 비각이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교육 기능을 담당하는 강학의 공간이다. 학생들의 교실에 해당하는 '명륜당(明倫堂)'이 있다. '인간 세상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의 명륜당은 가운데 대청을 두고 양쪽에 방이 있다. 가운데 넓은 대청은 학생들의 교실이고 양쪽 방은 교관들의 교무실 겸 거처로 사용했다.
명륜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학생들의 기숙사 서재와 동재가 있다. 동재는 양반의 자제들이 사용했고 서재는 평민의 자제들이 썼던 기숙사다. 서재 뒤쪽에 '문회재(文會齋)'가 있다. 일명 '사마재'라고도 부르는 이곳은 과거 1차 시험에 합격한 생원과 진사들이 모여 공부하던 곳이다.
문회재 앞에는 '양사재'가 있다. 육영재라고도 불렀던 곳으로 조선 중기에 접어들면서 향교에 입학하려는 학생들이 늘어나게 되자 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어 이곳에 모여 공부하게 했다. 당시 광주 사람들의 향학열이 얼마나 높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명륜당을 마주하고 또 하나의 문이 있다. 내삼문이다. 이문을 통과하면 제향의 공간이 나온다. 삼문이란 세 칸의 문이란 뜻이다. 능이나 서원, 사당, 궁궐 등 삼문 출입 시 '동입서출(東入西出)'이라는 예법이 있다. 동쪽(오른쪽)으로 들어가고 서쪽(왼쪽)으로 나온다. 가운데 문은 제관이 출입하는 문이다.
광주향교에서 가장 높은 곳, 제향의 공간에 들어서면 '대성전(大成殿)'과 마주 한다. 공자님의 궁전이라는 의미다. '문묘'라고도 부르는 이곳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동쪽에 안자와 자사 서쪽에 증자와 맹자 등 5성(五聖)과 송나라 2현(宋朝二賢) 정호와 주희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이외에도 설총, 최치원, 정몽주, 이황, 이이, 김인후 등 우리나라 18분의 성현(東國 十八賢) 위패도 함께 모시고 있다. 대성전 아래 좌 우측에는 동무(東廡)와 서무(西廡)가 있다. 동쪽과 서쪽의 행랑채라는 뜻으로 과거에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던 곳이다.
1951년 성균관에서는 "우리나라 유학자들을 격이 낮은 동무와 서무에 모시는 것은 사대주의적 발상이다"라고 결의하여 공자의 위패가 있는 대성전으로 옮겨 모시고 있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에 '석전대제(釋奠大祭)'를 지내고 있다.
그 외에도 유림회관과 충효교육관에서는 광주 유교대학, 한문학당, 충효교육, 다도 및 예절교육, 성년의 날 행사, 전통 혼례식 등을 진행하며 광주의 전통문화를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