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새벽, 대통령실이 있는 서울 용산구 삼각지역 인근 버스 정류장과 지하철역 일대에 윤석열 대통령을 풍자하는 포스터가 일제히 나붙었다. 조선왕조 시절 임금 용포를 입은 윤석열 대통령이 앞섶을 풀어헤친 모습이었다. 포스터 우측은 백지 상태였고, 상단에는 '마음껏 낙서하세요'라는 안내 문구가 조그맣게 적혀있었다. 낙서를 할 수 있는 펜도 걸려 있었다.
일부 포스터에는 시민들이 적은 낙서도 눈에 띄였다. 포스터에 남겨진 시민들의 낙서를 보면, '퇴진까지 1초 준다'·'세계적 망신, 경제 폭망 윤석열 퇴진하라'·'그냥 내려와' 등 윤 대통령을 비판하는 문구가 대부분이었다.
이 포스터는 오래 붙어있지 못했다. 13일 오전 경찰들이 해당 포스터를 모두 수거해갔기 때문이다. 포스터를 설치, 제작한 사람은 풍자 예술 작품을 전문으로 하는 이하 작가다. 이 작가는 "윤석열 대통령이 된 이후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나도 참을 수가 없었다"면서 "힘들어 하는 대중들과 함께 예술 공동 작업을 하고자 포스터를 제작, 게시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 작가가 윤석열 대통령 풍자 포스터를 처음 내붙였던 것은 지난 3일. 청계광장에서 열린 촛불 집회 때 처음 선보였다. 시민들 반응이 좋아 지난 8일에는 서울 종로 일대 버스정류장에도 붙였다. 3일과 8일 전시 때는 아무런 문제 없이 시민들이 낙서를 남긴 포스터를 다시 수거할 수 있었지만, 13일 용산에 전시된 포스터는 경찰이 모두 철거하면서 되찾을 수 없게 됐다.
이 작가는 정치 풍자 포스터도 하나의 예술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당대 시민들이 가진 의식을 정리해서 자신만의 조형으로 표현하는 것이 예술가들의 운명"이라며 "예술에서 정치 풍자는 인류 역사상 계속 있어왔고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앞으로도 나만의 예술 풍자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작가는 지난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새누리당의 유력 대선 후보였던 박근혜 전 대통령을 풍자하는 포스터를 부산시내 버스정류장에 부착했다가 선관위로부터 고발당하기도 하는 등 정치인 풍자 작품 활동을 해왔다.
아래는 13일 이 작가와의 일문일답.
- 윤석열 대통령을 풍자하는 낙서 포스터를 만들었는데 계기가 뭔가?
"예술가로 활동하면서 사회적 메시지가 강한 작품을 많이 했다. 주로 풍자작품을 전문으로 했는데 어느 순간 꼴보기 싫은 정치인 그리는 게 너무 싫어졌다. 그 뒤로는 풍경화를 그리며서 가급적 풍자작품은 안 하려고 했다. 그런데 윤석열이 대통령 된 후에 많은 사람들이 굉장히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한다. 나도 참을 수가 없더라. 이렇게 힘들어하는 대중들과 함께 공동 작업을 하고자 했다. 그래서 시민들이 자신의 글씨체로 직접 쓰는 형태의 포스터를 제작했다, 인터넷 댓글과 달리 포스터에 쓰는 글씨는 예술 작품이 되고, 그대로 역사가 된다. "
- 오늘 삼각지역에 붙였던 포스터는 경찰들이 다 철거를 했다고 하더라.
"지금 시간에는 당연히 철거했을 거다. 제보는 받았다. 오전 7시쯤 경찰 병력이 와서 철거를 하면서 다녔다고 그러더라. 오늘 새벽 2~3시쯤 삼각지 인근 버스정류장과 지하철역에 붙였는데 당시에는 인적이 거의 없었고, 제지하는 사람도 없었다."
- 지난 8일에도 종로에서 포스터 전시를 했는데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13일 삼각지는 상황이 달라진 것 같다.
"포스터가 모두 철거된 것 같아 속상하다. 그냥 놔두기를 바랐다. 판넬에 보면 '맘껏 낙서해주세요. 곧 수거합니다'라고 써놨다. 낙서 받는 게 작품의 완성인데 완성되기 전에 철거가 됐으니 가져올 수도 없게 됐다."
- 경찰에서 연락받은 건 없나.
"아직 없다. 아마 내 생각에는 경찰이 CCTV를 보면서 찾고 있을 것 같다."
- 포스터에 적힌 낙서들은 어떤 내용인가?
"대부분 욕설이다. '대통령은 퇴진해라', '특검 받아라' 같은 요구나 육두문자들도 많았다. 날 것 그대로의 글자들인데 특별히 지우거나 하진 않았다. 시민들과 말하자면 컬래버를 하는 거다. 낙서가 돼 있는 것까지가 작품의 완성이다. 예전에도 해봤었는데, 자신들의 분노나 감정을 본인의 글씨체로 적으라고 하니까 엄청 적으시더라. 그렇게 작품을 완성해 가는 거다. "
- 대통령을 풍자했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공격도 많이 받을 것 같다. 순수 예술과는 거리가 먼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을 수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정치적인 목적 아니냐는) 그런 얘기는 많이 들었다.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이런 걸 할 수 없다.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나는 직업이 예술가이고 정치인이 아니다. 예술가가 예술 행위를 하는 거다. 내가 생각하는 예술관은 당대 시민들이 가진 의식을 정리해서, 자신만의 조형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게 예술가들의 운명이라고 믿고 있다. 예술에서 정치 풍자를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상 계속 있어 왔던 것이 풍자이고, 앞으로 이어질 것이다. 나만의 방식으로 예술 풍자를 하는 거다."
- 앞으로 계획이 또 있나?
"각 도시마다 다니면서 포스터 전시를 할 거다. 포스터 옆에는 시민들이 낙서를 할 수 있게끔 펜을 달아놓고 낙서를 하도록 할 생각이다. 각 지역을 돌면서 그 지역 시민들의 낙서를 받을 거다. 그 낙서를 모아서 나중에 전시회도 열 생각이다. 지금 계획으로는 11월 국회에서 할 예정이다."
- 다음 포스터 부착 장소는 어디인가?
"아직 정확히 잡지는 않았는데 아마 대구에 가지 않을까 싶다. 특별한 의미는 없다. 그냥 한 번 가보고 싶다. 거기 분위기가 어떤지, 어떤 낙서를 해주실지 궁금하다."
- 윤석열 정부에서 굉장히 힘들다고 하는데, 어떤 점이 그런가?
"문화예술인들을 함부로 대한다. BTS 초청 논란 문제도 그렇다. 보수 정권의 특징 중 하나가 모든 분야를 다, 특히 문화·예술까지 다 손에 쥐고 좌지우지하려는 못된 버릇이 있다. 예술인들을 통제하려 한다. 과거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정권을 풍자하는 애니매이션을 만들었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내가 처벌받는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 때는 풍자 포스터를 만들었더니 수차례 기소를 당했다. 지금도 포스터 등의 예술 활동으로 핍박을 받을 것이라는 불안감이 있다. "
- 그런 불안감에도 불구하고 이런 활동을 하는 이유가 있다면?
"양심과 신념이다. 예술에 대한 양심과 신념이다. 예술 활동을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 적은 없다. 누군가가 이로 인해서 정신적, 물질적으로 굉장한 피해를 당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물론 이 활동으로 처벌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크게 두렵지 않다."
- 대통령에게 한마디 한다면?
"자연인으로 돌아가시라고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다. 그분은 시대에 맞지 않는 분이다. 예술로 말하면 지금 시대가 포스트모던 시대인데 이 세상이 다양하다는 걸 이해 못하고, 자기 말만 진리라고 생각하는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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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실 부근에 기습부착된 윤석열 대통령 풍자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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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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