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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지역에서 1919년 만세운동을 한 곳은 병영이 유일하다. 그래서 울산읍과 병영이 있는 하상면은 미묘한 경쟁 관계에 있었다. 울산 동헌이 있었던 울산읍은 문관적 전통을, 병마절도사영이 있었던 하상면은 무관적 전통을 지닌 지역이었다. 울산지역은 울산과 언양, 울산읍내와 울산읍외의 대립적 구조를 가지며 발전하였다.

만세운동을 주동한 병영 청년들

울산병영 만세운동의 배후에는 1917년에 결성된 병영청년회가 있었다. 1920년 2월 10일 창립한 울산청년회보다 먼저 있었다. 병영에는 1906년 8월 30일 개교한 사립 일신 학교가 있었다. 현재 병영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관아건물인 제남관에 학교가 설립되었다. 교장은 이재호, 송태관, 이종화가 있었고 1910년에는 일본인 교사도 채용하여 운영했다. 1919년 3월 학성공립보통학교로 인가되었다.

1919년 4월 4일과 5일에 병영 만세운동은 진행되었다. 1919년 4월 4일 아침 일신학교(현 병영초) 운동장에서 축구공이 하늘 위로 치솟았고, 이를 신호탄으로 사람들이 일제히 태극기를 꺼내어 독립만세를 외쳤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총검으로 무장한 일본수비대와 충돌해 그 자리에서 엄준, 문성초, 주사문, 김응룡 등 네 명이 순사(殉死)하고 많은 사람이 중경상을 입고 해산했다.

순국한 동지의 넋을 달래기 위해 기미계를 만들어 매년 4월 6일에 비밀리에 빠짐없이 제사를 받들어 오다가 1955년 삼일사를 세웠다. 사립일신 학교 출신들이 만세운동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병영지역 사회운동의 주축이었다. 만세운동으로 인해 학성공보의 개교가 5월 20일로 늦춰졌다.

울산은 언양과 병영, 남창에서는 만세운동이 일어났지만, 읍내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특이한 지역이었다. 울산읍에 비해 병영은 독자적인 지역이었다. 마치 언양이 아직 울산에 통합되지 않은 것과 같았다. 1926년 매일신문 보도에 따르면, 울산 병영에는 구한국시대의 유명한 군벌가(軍閥家)들이 아직까지 있으며 옛날의 군벌가 혹은 그 자제들이 거주하는 관계상 사상계는 울산군내에서 제일이다.

독립 만세운동도 유독 병영에서만 격렬하게 일어나 사상자까지 있었다. 청년들의 의지가 강경하여 단결력이 공고하다. 병영은 작은 군 읍내보다 오히려 대대적 집단지역이다. 하상면사무소나 경관주재소도 청년들의 규모에 미치지 못한다. 면사무소는 세금만 받을 뿐이지만 대개는 자치적으로 여러 가지를 실행하는 지역으로 전 조선을 통하여 몇 개 없는 지역이다. 그런데 소작민의 소작료에 의해 부호들이 살아가는 이기주의적으로 지방발전에는 유감이다. 또 술과 기생에 빠져 사는 병영의 부호자제들은 반성이 시급하고 사회사업에 착안(着眼)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1924년 1월 6일 오후 2시 하상면의 병영소년회 임시총회가 병영예배당에서 열렸다. 신구사항을 처리하고 악기구입에 대한 토의가 있었다. 특별회원 이일태(李一泰)가 55원을 기부하여 즉석에서 1백여 원의 의연금이 모여 악기를 구입하기로 하고 6시에 폐회하였다. 병영소년회에서는 구정(舊正) 월망일(月望日)을 이용하여 연극을 개최하였다. 천진난만한 소년의 연기 많은 사람의 흥미를 끌었으며 관중으로부터 많은 의연을 받았다.
 
병영청년회 1주년 기념 총회  병영청년들은 사립일신학교와 학성공보 출신으로 일제 식민지기 사회운동의 주축으로 성장했다.
병영청년회 1주년 기념 총회 병영청년들은 사립일신학교와 학성공보 출신으로 일제 식민지기 사회운동의 주축으로 성장했다. ⓒ 병영초등학교
 
병영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룬 병영출신들은 기미계(己未契)를 조직하여 유대를 강화했다. 만세운동 출옥자들이 1924년 가을 '부흥총회' 이후 병영청년회에 참여하였다. 1925년 4월 병영청년회는 울산청년 단체 대표자 간담회에 참석하였고 4월 24일 '혁신총회'를 통해 일진월보(日進月步)하게 되었으며 4월 29일 병영청년회관을 신축하기로 결정하였다.

1926년 4월 27일 청년회관 낙성 이후 무산청년 백여 명에게 야학 공부를, 일반회원에게는 사회과학지식 보급을 하여 투쟁의 역군을 양성하기 위해 팜플렛과 과학 서적 구입 등을 통해 시대사조에 따르는 청년운동을 하기로 하였다. 병영청년회는 5월 8일 혁신총회를 통해 사회진화의 법칙에 의하여 대중 본위인 사회건설의 역군 훈련과 양성을 목표로 하는 강령을 채택하였다. 문화주의적 청년운동에서 사회주의 경향으로의 변화를 도모한 1926년 5월의 병영청년회의 혁신총회는 병영 소년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병영 소년단의 활동


1925년 5월 1일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환희에 뛰놀고 기쁨에 춤추는 울산병영 학성공립보통학교 1백여 명의 학생들은 김영진 선생님의 인솔하에 붉은 글자로 "어린이날"이란 기를 휘두르고 어린이 기념 창가를 높이 부르면서 시내 시외를 행렬하여 기념의 뜻을 다하였다. 이날 수많은 관중으로 하여금 갚은 인상을 주었다. 

1925년 12월 31일 병영소년회에서는 병영예배당에서 소년소녀현상동요동화대회를 열었다. 600여 명의 청중이 모였다. 동화는 1등 노덕출, 2등 박영호, 3등 이성금(여), 4등 김중삼, 5등 문형목이 받았고 동요는 1등 김갑수, 2등 이이호, 3등 윤장석, 4등 최말연(여), 5등 윤기석이 받았다.

1926년 1월 6일 오후 7시 병영소년회는 병영청년회관에서 병영지역 소년소녀를 초대하여 신년 다과회 및 간담회를 개최하였다. 약 700여 명이 참석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즉석에서 병영소녀회 발기를 하여 회원 30여 명을 모집하였다. 주요 회원은 정입문, 이덕만, 이말선, 최두연이었다.

1926년 3월 21일 오후 9시 울산군청년연맹 주최의 남선웅변대회가 병영청년회관에서 있었다. 울산군청년연맹은 13개 단체로 구성되었는데, 울산성우회ㆍ오일회ㆍ동면구락부ㆍ강동노동청년회ㆍ대현청년회ㆍ언양청년회ㆍ중남청년회 등이다. 관중은 5, 6백 명이 넘었다. 울산군청년연맹 검사위원 오의상의 사회로 10여 명 연사의 웅변이 있었다. 웅변 중간 중간에 강군숙, 정립분, 최형식의 독창이 있었다.

연사와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신계난 "식민지 인사의 사(死)를 조(弔)함", 조형진 "당면문제", 성세빈 "신생의 의의", 강철 "미래의 승리", 박홍식 "물질문명의 반면(反面)", 김상률 "교문을 나서는 무산소년아", 이종수 "무엇보담 단결력", 유창식 "청년 동모(同侔)에게", 권우락 "인류생활은 무엇", 박문한 "청년운동의 본무(本務)", 이규경 "우리의 생명은 언제까지 지속할가".

연사들은 울산 청년운동의 지도자들이었다. 특히 성세빈의 웅변의 다수 청중이 열광하였다. 청중 속에는 병영에 사는 소년들도 있었다. 그들 역시 연사들의 내용에 호응하며 박수를 보냈다.

1926년 8월 13일 밤 병영청년회의 후원으로 소년소녀동화동요대회를 열었다. 심사위원은 조선교육협회 이사 신명균과 경성중동학교 교수 정렬모가 조선어강습회를 계기로 울산에 채류하여 하기로 하였다. 동화부는 심사를 신명균이 하였다. 1등 조〇우 "사람의 일은 알 수 없다.", 2등 최경식 "불쌍한 소년소녀", 3등 박현희 "지혜 많은 괴인"이 수상하였다. 동요부는 심사를 정렬권이 하고, 1등 이규섭 "잠아", 2등 김화 "우리집", 3등 윤기석 "바람아 불어라", 4등 이종기 "불고기"가 선정되었다.

병영청년회에서는 문맹 아동을 위한 노동야학을 개시하여 운영하였으나 재정 곤란과 교사가 없으므로 많은 난관 속에 폐쇄의 비운을 맞았다. 1926년 봄 이래로 병영청년회 신축회관에 야학을 개설하여 운영하였는데, 병영소년회 간부들이 열성적으로 참여하여 현재 100여 명의 무산아동이 교육을 받고 있다.

1927년 5월 1일 어린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병영의 소년·소녀 180여 명은 3, 4일 전부터 기 행렬을 준비하였다. 경찰의 근신 중이니 행렬을 하지 말라는 만류로 인하여 부득이 시내 행렬은 중지하고 당일 오전 8시부터 병영청년회관에 집합하여 2천여 장의 선전 전단을 시내 각 집마다 산포하였다. 10시에 어린이날 식을 거행한 후 야외산보와 유희 등으로 즐겁게 뛰고 기념하였다. 오후 8시부터 청년회관에서 가극 등의 재미스럽고 의미 깊은 여흥을 하였다.

1928년 5월 어린이날은 울산 각 소년회 연합으로 성대히 거행하였다. 오후 1시부터 울산청년회관에서 주악을 하는 가운데 기념식을 순서대로 거행한 후 2시 30분부터 기(旗) 행렬을 거행하였다. 병영과 읍내를 한바퀴돌고 밤에는 울산불교포교당에서 부모화를 열었다.

축구대회를 개최한 학성소년회, 범학소년회(1925)
 
울산지역 소년축구대회 광고 - 울산지역은 병영만세운동이 축구공 시축에서 시작되었다는 전설이 아닌 전설이 있다. 그런 까닭인지 울산지역에 소년 축구대회가 자주 열렸다.
울산지역 소년축구대회 광고- 울산지역은 병영만세운동이 축구공 시축에서 시작되었다는 전설이 아닌 전설이 있다. 그런 까닭인지 울산지역에 소년 축구대회가 자주 열렸다. ⓒ 출처 ; 남선소년축구대회, 동아일보, 192
 
울산은 1920년대부터 축구의 도시였다. 1921년 9월 10일 울산공보운동장에서 울산천도교, 불교, 기독교소년회가 주최한 축구대회가 소년축구대회의 시작이었다. 당시 우승은 천도교 소년회가 하였다.

1922년 3월 13일 서생면 사립학교, 서생동면 신암학교, 대현면 대흥학교 3개 학교의 춘계연합축구대회가 서생학교 운동장에서 있었다. 우승은 서생학교가 하였다. 14일 오후에 서생왜성 고적지를 탐승한 후 4시에 해산하였다.

1925년 5월 10일 오전 9시부터 학성소년회 주최, 시대일보울산지국 후원으로 제12회 남선축구대회가 울산역전 광장에서 열렸다. 참가 자격은 18세 이하로 신장은 5척 3촌까지로 제한하였고 참가비는 3원이었다. 그런데 대회는 무사히 마쳤으나, 공정성에 문제가 있는 대회 진행을 하였다.

소년 축구대회로 참가자를 소년과 키로 참가 자격을 제한했음에도 외모로 봐도 20세가 넘는 청년 선수가 참가하거나 키 제한을 넘는 선수가 있어 마치 어른과 아이의 승부가 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우승은 서생소년단이 하였다, 그런데 대절(貸切) 자동차에 기생을 태우고 와서 구설수에 올랐다.

1925년 7월 29일에는 온양면 온양구락부가 주최하고 시대일보온냥분국이 후원한 남선축대회가 온양공보 운동장에서 열렸다. 6개 팀이 참가하여 2일간 진행된 대회에서 동래군이 우승하였다. 8월 16일 동면 동면구락부에서 동아일보 동면분국의 후원으로 방어진 우암운동장에서 전동면축구대회를 열었다. 참가팀은 5개로 참가비는 1원이었다. 대회장 박학규의 개회사가 있은 후 장병준 배경희 정명수 정기수 심판으로 경기가 시작하다. 방어진군, 동부, 염포부 3팀이 참가하여 우승은 방어진군이 하였다.

9월 23일 동면 갑자구럭부 주최, 동아일보동면분국 후원으로 동면공보운동장에서 축구대회가 개최되었다. 대회장 이종태의 개회사와 심판 이신우, 배경희(여)에 의해 경기가 진행되었다. 참가팀은 일산군, 염포군, 방어군, 서부군 4팀으로 결승은 방어진팀과 염포군이 맞붙었는데 방어군이 기술이 우수하여 연승으로 우승하였다.

1926년 5월 10일 학성소년회 주최, 동아일보 시대일보 조선일보 울산지국 후원으로 제2회 남선축구대회가 열릴 예정이다. 참가자격은 소년단 선수로 신장은 5척 1촌이며 차가비는 3원이며, 우승단은 우승기와 왕복 여비를 보조할 예정이다.

동면 5월청년동맹에서 제2회 동면축구대회를 1926년 8월 8일 9시 방어진 우암운동장에서 개최 예정으로 준비가 바빴다. 체육 양성과 상호친목을 도모하고, 기술적 정신을 함양할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1926년 8월 14, 15일 범서면 범학소년회 주최로 전울산축구대회가 개최될 예정이다. 장소는 삼호교 서쪽 백사장으로 참가비는 2원이며 팀별 인원은 후보까지 9명으로 하였다. 학성소년회는 1926년 8월 2일 불교소년단과 같이 조선일본 울산지국의 주최의 남조선웅변정구대회를 울산청년회, 불교소년단과 같이 후원하였다.

울산 병영 소년들이 만세운동의 시작으로 축구공을 찬 것이 울산지역의 축구대회 활성화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을까. 축구대회를 통해 소년들은 신체를 단련하고 단결력을 기르고 지역과 지역이 교류하고 연대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울산・양산 삼산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저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

덧붙이는 글 | <울산저널>에도 게재됩니다.


#언양소년운동#울산소년운동사#병영소년회#울산소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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