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의 기쁨을 즐기지도 못한 채 혼란한 해방공간, 분단과 참혹한 3년전쟁 그리고 참담한 전후복구에 국민은 고된 삶을 살아야 했다. 아리랑을 비롯하여 전통가요가 미쳐 생환하기도 전에 양풍이 휘몰아쳤다. 왜풍이 쫓겨난 자리에 양풍이 들어선 것이다.
해방 공간의 대중가요계는 사실상 자생적인 것 보다 왜래적 영향에 의해 유입된 구미의 각종 음악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미군의 상륙이라는 상징적 사건과 관련된다. 그들이 가지고 온 재즈의 선풍과 라틴 음악적 색채는 리드미컬하고 이국적인 향기를 풍기는 노래들을 생산케 하였다. (주석 5)
그렇다고 자생력이 강한 아리랑이 완전히 묻힌 건 아니었다. 곧 다른 형태로 나타났다. 1953년 현동주 작곡, 나화랑 작사, 전영주 노래의 <아리랑 맘보>가 유행하고, 1955년 대중잡지 <아리랑>이 삼중당에서 창간되어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전매청은 1958년 최초의 아리랑 담배를 제조 판매하였다.
아리랑은 노래로서만이 아닌 각종 상표로 널리 쓰이기 때문이다.
아리랑 음악교실, 아리랑 사진관, 아리랑 식당, 아리랑 우표, 아리랑 다방, 아리랑 여관, 아리랑 퀴즈, 아리랑 미용실… 대중이 선입견이나 부담감 없이 이용할 수 있는 각종 상표의 이름으로서 선호되었다.
또한 많은 문인ㆍ학자들이 아리랑을 주제로 시와 수필ㆍ소설을 썼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걸맞지 않지만, 1950년대 발매된 담배 - 아리랑ㆍ사슴ㆍ백양ㆍ파랑새ㆍ진달래ㆍ나비ㆍ풍년초 같은 담배 이름으로 노랫말을 지은 <국산 연초 아리랑>은 원견초 작사, 손목인 작곡, 김용만의 노래로 애연가들의 사랑을 받았다. 양담배 대신 국산담배를 애용하자는 충심이 담겼다.
연초 아리랑
아리랑 연기 속에 사랑이 피고
아리랑 피어물면 행복이 오네요
아리랑 고개에 사슴이 놀고
쓰리랑 고개에 백양이 논다
파랑새 피우는 마을 오곡이 익어
풍년초 연기마다 얼씨구 절씨구
예해요 풍년이 온다.
아리랑 고개에 진달래 피고
진달래 꽃 위에 나비 춤춘다
양담배 피우는 마을 눈물이 오고
풍년초 피우는 마을 얼씨구 절씨구
예해요 웃음이 온다.
진달래 고개에 사슴에 백양
파랑새 진달래 나비 연기는
피우는 사람마다 슬픔을 잊고
내일의 새 희망이 얼씨구 절씨구
에해요 찾아온다. (주석 6)
주석
5> 박윤우, <해방 후 대중가요의 사회사>, <노래 2>, 126쪽, 실천문학사, 1986.
6> 박민일, <아리랑 정신사>, 348~349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문화열전 - 겨레의 노래 아리랑]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