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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아부지 어디 갔냐?" "모르는디요." "이 새끼가 죽으려고 환장했나!" 이창호(가명)는 칼빈총을 10살 최원주(1941년생) 가슴에 들이댔다. 이씨는 향토방위대 임실군 청웅면 남산리 책임자였다. 최원주는 가슴팍 총구에 이가 딱딱거리고 다리도 후들거렸다. 최원주의 아버지 최회구는 며칠 전 "저 위에서 밀고 들어와 피난 가야 할 것 같다"라는 밑도 끝도 없는 말을 남기고 종적을 감추었다. 

"지금 뭔 짓을 하는 겨?" 고함의 주인공은 최원주의 할머니 박성춘이었다. "아니. 이게 왠일여? 애가 아부지 간 데를 몰라서 모른다고 했는데 총을 들이대. 한동네 사람이 이래도 되는 겨!" 손주 목숨이 걸려있으니 할머니는 총이고 뭐고 겁이 나지 않았다. "에이. 니미럴" 누구에게 던지는 욕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고 이창호는 총구를 내렸다. 그제야 박성춘은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1951년 1월 중순 박성춘은 아들과 며느리, 큰손주가 없는 집에서 둘째 손주를 지키기 위해 식은 땀을 흘려야 했다. 

오소리 작전 개시
 
 청웅면 남산리 폐금광 입구
청웅면 남산리 폐금광 입구 ⓒ 박만순

북한군 점령 시절(인공 시절)에 완장을 찼거나 인민군과 인민위원회 심부름을 한 이들은 군경이 수복하면서 모두 몸을 피했다. 또 청웅면과 강진면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몸을 피했는데 "젊은이들이 집에 있다가는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실제 제11사단의 토벌 작전은 중산간 마을 주민들로 하여금 그 소문을 사실로 믿게 했다. 그들은 빨치산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았다. 

임실군 청웅국민학교 교실에 구금된 이들은 그렇게 피신한 이들의 가족에다 일반 주민들도 다수 포함됐다. 이들 300여명은 줄지어 부흥광산 입구 약 2km 길을 걸어갔다. 군경은 빨치산과 부역자(?)들이 이 폐광에 숨어 있다는 정보를 접했다. 실제로는 군경을 피해 피신한 마을의 민간인이 대부분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부터 개발된 금광은 1943년에 폐광됐는데 굴 입구가 32개나 됐다. 그 중 28개를 폐쇄한 군경은 끌려온 주민과 군경, 향토방위대원을 4곳으로 분산시켰다. 그리고는 청웅면 남산리 폐광굴 입구와 강진면 백련리 금광굴 입구에 생솔가지와 고춧대를 쌓아놓았다.

"굴에 들어가서 당신 남편한테 자수하라고 해!" 경찰에 등이 떠밀린 박래업은 남산리 폐광굴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박래업은 최회구의 아내이자 최정기·원주의 어머니였다. 서늘한 바람이 뺨에 와닿아 괴기스럽기까지 했다. 몇 발자국을 내디뎠지만 굴 안이 캄캄해 더이상 앞으로 갈 수 없었다. 

"정기 아부지. 안에 계신교?" "...." "정기 아부지, 자수하면 살려 준답니다. 있으면 얼릉 나오소." 목이 쉬어라 외쳤지만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32개의 입구로 연결된 광도(鑛道)는 벌집처럼 연결되어 그 길이를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굴 깊숙이 들어가 있었기에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었다.

결국 박래업은 10분 만에 굴 밖으로 나왔다. "왜 벌써 나와!" 경찰은 눈을 부라리고는 그녀에게 성냥을 건넸다. "불 피워!" 청천벽력이었다. 생솔가지와 고춧대에 불을 지피면 연기 때문에 굴 안에 있는 사람들이 질식사할 판이었다. "빨리 해"라며 경찰은 가슴에 총구를 들이댔다. 성냥으로 생솔가지에 불을 지피며 그녀는 피눈물을 흘렸다. 이른바 '오소리 작전'이라 불린 이 야만 행위는 1951년 3월 14일에 벌어졌다.
 
 강진면 부흥리 금광굴 입구
강진면 부흥리 금광굴 입구 ⓒ 박만순

오소리 작전은 임실경찰서(청웅지서, 강진지서) 경찰과 국군 제11사단 제13연대 제1·2대대 군인들이 1951년 3월 14일부터 16일까지 3일간에 걸쳐 청웅면 남산리(강진면 부흥리)의 폐금광 안에 있던 민간인 300~400명을 살해하고, 생포한 50~70명은 10여 일 후 강진면 회진리 속칭 멧골에서 총살한 사건이다(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보고서』).

굴 안에 피신해있던 사람들의 가족은 군경의 강요로 3일간 굴 앞에서 솔가지와 고춧대에 불을 지폈다. 생솔가지와 고춧대가 타면서 연기는 굴 안으로 급속히 빨려 들어갔다. 굴 깊숙이 있던 이들은 연기에 콜록이기 시작했고 고통에 아우성쳤다. 젖먹이 아이부터 질식사하기 시작해 대부분 피난자들이 숨졌다.

몇몇 젊은이들은 탈출을 시도했다. 청웅면 청계리의 정삼암(1922년생)은 최대한 숨을 자제하고 연기가 흘러가는 모습을 살폈다. 연기가 외부로 빠져나가는 작은 틈을 발견한 그는 힘을 써서 굴 벽을 부수고 그곳으로 탈출했다. 군경의 총격이 이어졌지만 눈 위로 몸을 던진 그는 백련리로 피신했다. 다행히 총을 맞지 않아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남편도 죽고 아들도 죽었다

폐금광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온 50여 명은 이후 임실군 강진지서에 구금되었다. 그 중에는 청웅면 구고리의 박순남(당시 16세)도 있었다. 그녀는 해방 직후 전주의 오한약방에서 아기를 봐주는 아기담살이 생활을 했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고향인 임실에 왔다가 폐금광 사건을 당한 것이다.

얼마 후 강진지서에 헌병대 지프차가 멈췄다. 차에서 내린 대전 헌병대 대장이 지서 안으로 들어가자 지서장이 기겁을 했다. "여기 박순남이라고 있지요?" "네." 유치장에서 나온 박순남에게 헌병대장은 "빨리 타!"라고 했고, 지프차는 전주를 향해 출발했다.

그녀가 강진지서에 구금돼 있다는 소식을 듣고 대전에서 부랴부랴 임실 강진지서로 온 헌병대장은 오한약방 큰집 아들이었다. 박순남은 그렇게 살아났지만 그의 부모와 오빠, 올케는 굴 속에서 질식사했다. 박순남을 제외하고 강진지서 유치장에 있던 민간인 50여 명은 이틀 후에 강진면 회진리, 속칭 '멧골'에서 군경에 의해 총살당한다.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남산 폐광굴 희생자를 약 450명으로 추정하지만 유족들은 약 600명으로 추산한다. 

남편이 굴 안에 있는데도 군경의 강요로 불을 지핀 박래업. 그녀의 비극은 계속됐다. 그는 장남 최정기(당시 17세)의 죽음을 목격해야 했다. 최정기는 아버지를 따라 굴로 피신했다가 집으로 왔다 붙잡혀 청웅국민학교 교실에 구금되었다. 오소리 작전 이후 그는 청년 20여 명과 함께 청웅국민학교 쓰레기장으로 끌려 나갔다. 그곳에서 청웅면 향토방위대원들에게 몰매를 맞아 죽임을 당했다.

이창호에게 죽을 뻔했던 박래업의 둘째 아들 최원주는 오소리 작전 직후 집안 어른들에게 "네 아버지 시신을 확인해라"는 말을 듣고 남산리 굴 입구에서 아버지 최회구의 시신을 확인해야 했다. 최원주의 동생 최정근(1947년생)은 아버지와 형이 억울한 죽임을 당했음에도 '빨갱이 가족'이라는 굴레 속에서 반백 년을 살아야 했다. 특히 군 제대 후에 법원 시험을 준비했는데 신원조회로 응시조차 할 수 없었다.

아버지 서상호를 남산굴에서 잃은 서창록(1947년생)은 10대 후반부터 정신적 방황을 했다. 그는 오소리 작전에 앞장선 경찰과 향토방위대원들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에 불탔다. 그는 당시 수렵면허증을 받아 총기를 휴대할 수 있었는데, 향토방위대 남산리 책임자 이창호를 찾아 서울, 부산 등 전국을 돌아다녔다. 2022년 현재는 임실군 유족회장을 맡아 아버지와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애쓰고 있다.
 
 폐광굴에서 살아나온 이들을 총살시킨 묏골
폐광굴에서 살아나온 이들을 총살시킨 묏골 ⓒ 박만순

#폐금광#오소리작전#질식사#향토방위대#청웅국민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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