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윤석열 대통령은 유엔 총회 연설에서 21차례에 걸쳐 '자유'를 강조하였다. 취임사에서 무려 35차례 '자유'를 언급한 이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유' 발언은 계속되었다. '자유'라는 용어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분석은 이 글을 쓰는 의도가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외교의 범주에서 '자유'는 미국 우호적인, 그리하여 미국이 주도하는 가치동맹 혹은 반중국 포위의 내용을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새 정부는 대선 과정부터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더 이상 전략적 모호성(strategic ambiguity)에 갇혀 있지 않고 분명하게 전략적 투명성(strategic clarity)을 보여주겠다고 목청을 높여왔다. 한 마디로 미국 편에 확실하게 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새 정부 출범 후 그간 미국에 대한 무한대적 '구애'의 움직임이 이어졌다.
하지만 정작 미국으로부터 되돌려받게 된 것은 IRA, 인플레이션감축법이었다. IRA는 미국 일방주의(unilateralism)와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의 적나라한 표현으로서 자유무역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WTO 규범에 명백하게 위배되며 우리와 체결한 한미 FTA도 위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대통령은 유엔총회 연설 중 스무 번도 넘는 '자유' 발언이 있었지만, 정작 우리에게 이미 결정적으로 중요한 현안으로 부각된 '자유무역' 발언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미국에 경도된, '신념화된 과잉 확신'
사실 문재인 정부를 포함하는 역대 모든 정부의 외교 분야에서 미국에의 경도 현상은 언제나 압도적인 상수(常數)였다. 그러나 이번 정부에서는 아예 그 '끝판왕'을 보여주고자 작정하는 모양새다. 미국인보다 더 미국을 애호하는 '신념화된 과잉 확신'으로 충만되어 있는 듯하다. 또 이것은 미국의 힘에 대한 과잉 평가와 그 반대 급부로서의 중국에 대한 과소 평가(혹은 중국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과잉 반응)와 결부되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최근 펠로시 미 하원의장 방한 때 중국의 눈치를 보다가 면담이 불발되었던 사건에서 현 정부의 단골 메뉴였던 반중국 노선은 완전한 자기 모순과 언행불일치를 노정시켰다. 결국 그 반중 노선이란 실행력을 전혀 갖추지 못한 국내용의 정치적 수사와 선동 역할이라는 평가를 가능케 한다.
일본에 대한 '구애', 독도 인근 합동군사훈련까지... 위협 당하는 우리 주권
한편, 한일 간 현안으로 부상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와 관련하여 주일 한국대사는 "일본 기업 자산의 현금화를 동결하고 외교적 해법으로 풀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강제동원 피해자 측은 즉각 반발하면서 "일본기업의 입장을 대변하는 주일대사는 어느 나라 대사냐!"며 질타하였다.
주일대사는 납북 일본인 가족을 면담하기도 했다. 그는 일찍이 박근혜 정부에서 국립외교원장까지 역임한 바 있다. 이 나라 국립외교원의 정체성에도 의문부호가 붙을 수밖에 없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외교부는 "강제동원 문제 해법 마련을 위한 외교적 협의가 다각적으로 외교적 노력을 하고 있다"라는 내용이 담긴 '유사한 취지'의 '의견서'를 대법원에 냈다. 국가란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가장 큰 임무일 터이다. 그런데 국민의 권리를 보호해주지는 못할망정 강제동원 피해자가 스스로 싸워서 얻은 판결을 양보하라고 하는 것이 과연 국가가 할 일인가?
대통령은 "일본이 우려하는 주권 문제 충돌 없이 채권자들이 보상받을 수 있는 방안을 지금 깊이 강구 중"이라고 밝혔다. 강제동원 피해 국민을 '채권자'로 칭하고 그것도 '배상'이 아닌 '보상'이라고 말하면서 반면 일본의 주권은 배려하고 있다. 국가로서 '자기 부정'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대단히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지난달 30일, 독도 인근 해상에서는 한미일 연합군사훈련이 진행되었고, 여기에는 욱일기를 건 일본 해상자위대도 참여하였다. 독도를 자기 영토라고 강변하고 있는 일본과의 합동군사훈련은 이미 우리의 '주권'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이다.
외교에서의 실정이 가장 큰 데미지를 초래한다
한 국가가 전개하는 외교의 목적이란 무엇보다 국익, national interest에 존재한다. 현 정부가 줄곧 '자유'를 주창하고 '주권'을 강조한 결과는 과연 무엇일까? 취임한 그날부터 오늘까지 그토록 강조해온 '자유'에의 뜨거운 외침은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 IRA라는 메아리로 되돌아왔고, 그토록 일본의 주권을 배려했건만 돌아온 것은 '간담'으로 끝난 '회담'이다. 한국 외교가 이렇게 국익 추구의 길을 잃고 헤매는 사이에 무역수지 적자가 급속도로 확대되고 국내 주식시장이 크게 동요하면서 제2의 금융위기설까지 제기되는 좋지 못한 상황이다.
흔히 미국과 중국 간 패권 경쟁 사이에서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상황"으로 묘사되면서 한국이 처한 어려움이 극적으로 강조된다. 그러나 한반도는 국제정치에서 핵심적인 지정학적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전형적인 전략적 요충지이다. 한반도는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에 의해 역설적으로 그 전략적 가치가 대단히 높아진다. 특히 미국이 중국에 대한 전방위적 포위를 구사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그 전략적 가치는 극대화될 수 있다. 현재 드러나고 있는 IRA 상황과 대일본 저자세 외교는 스스로 자초한 전략적 가치의 약화와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내정에서의 실책에 비해 외교에서의 실정이 권력에 가장 큰 데미지를 입히고 치명타를 주게 된다. 국가 정체성과 민족적 자존감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 시기 일본과 밀실에서 맺었던 '위안부합의'가 박근혜 정부 탄핵의 핵심적 요인 중 하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명심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