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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힌골 전쟁박물관 모습. 1939년 구소련과 몽골군이 연합해 일본관동군과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군 군인들과 싸워 이긴 전승기념박물관이다.
할힌골 전쟁박물관 모습. 1939년 구소련과 몽골군이 연합해 일본관동군과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군 군인들과 싸워 이긴 전승기념박물관이다. ⓒ 오문수
 
초이발상에 도착한 일행의 다음 목적지는 몽골의 동쪽 끝에 있는 할힌골이다. 몽골어 '골'은 우리의 '강'에 해당한다. 할힌골에는 '할흐강'이 흘러 '할힌골'이라 불렸다. 몽골 수도 울란바타르에서 1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도시 할힌골은 도시라고 부르기에는 거북하고 차라리 우리의 행정단위인 '리' 정도의 마을이라고 불러야 타당할 것 같다.

초이발상에서 할힌골까지는 장거리이고 초원길이기 때문에 중간에서 야영하기로 했다. 일행은 마트에서 다음 행선지 중 먹을 식량과 마실 물을 준비한 후 위풍당당하게 길을 나섰다. 차가 시가지를 벗어나자마자 곧바로 초원길이다.

울퉁불퉁하고 먼지나는 초원길이지만 몽골 여행에 이골이 난 세 명은 해지는 서쪽 하늘의 석양을 바라보며 룰루랄라 잡담을 즐기고 있었다. 야영할 텐트도, 먹을 양식과 반찬, 침낭도 준비됐으니 밤이 깊어지더라도 걱정될 게 없다. 까짓것 차를 세우고 초원에서 텐트를 치면 된다.

5대양 6대주를 돌아본 필자가 몽골 여행을 즐기는 이유 중 하나는 몽골 어디에 가서 야영을 해도 걱정할 필요를 못 느끼기 때문이다. 총기 사고가 빈번한 미국은 말할 필요도 없고 유럽이라고 해서 아무 데서나 야영이 가능할까?

유럽 배낭여행을 하며 여권과 카드도 분실해 보았고 소매치기에게 배낭 속 소지품을 도난당할 뻔했다. 남미에서는 소매치기와 강도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올지 몰라 긴장을 풀 수 없었다.
          
 할힌골 전투의 중심에 섰던 할흐강으로 강 건너편이 일본 관동군과 일본 괴뢰국이었던 만주군이 구소련군과 몽골 연합군에 맞서 싸웠던 현장이다. 할힌골전투(1939.5.11~1939.9.16)에서 일본 관동군 23사단 병력이 거의 전멸한 전투현장이다.
할힌골 전투의 중심에 섰던 할흐강으로 강 건너편이 일본 관동군과 일본 괴뢰국이었던 만주군이 구소련군과 몽골 연합군에 맞서 싸웠던 현장이다. 할힌골전투(1939.5.11~1939.9.16)에서 일본 관동군 23사단 병력이 거의 전멸한 전투현장이다. ⓒ 오문수

하지만 몽골 초원에서 수십 번 야영을 했지만 단 한 번도 신변의 불안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이동이 천직인 노마드인지라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는 걸까? 길을 물으면 언제든지 친절하게 대답해주는 사람들과 낯선 사람들에게 친절한 몽골인들. 특히 한국인들에 대한 호감은 남다르다.

반면 몽골인들을 학살했던 중국과 러시아인들에 대한 적개심과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몽골을 거쳐 소련까지 정복하려했던 일본인들에 대한 의구심은 상당하다. 한국에 시집 온 몽골 여인과 노동자들까지 포함하면 3만여 명이 한국에 살고 있으니 몽골 인구의 1%가 한국에 살고 있는 셈이다. 10여년 전 한국을 방문했던 몽골 정치인이 한국과 연방제를 하자고 제안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깜깜한 초원길을 10시간 달려 도착한 할힌골

초이발상 도시를 떠나 한 시간을 달려온 운전사 저리거씨가 야영할 자리를 찾다가 "큰일났다!"며 계기판을 보여준다. 기름을 넣지 않고 달려온 것이다. 인근에는 유목민들이 사는 마을도 게르도 심지어 가축도 안 보이는 대초원길이다. 이곳에서 기름이 떨어져 차가 멈추면 기름통을 들고 얼마나 걸어가서 기름을 얻어온단 말인가!

난감해진 일행은 차를 돌려 다시 초이발상까지 되돌아가 기름을 가득 채우고 가던 길로 달리기 시작했다. 앞에서 먼지를 날리며 달리던 12톤 트럭들을 따돌리고 할힌골을 향해 달리던 운전사 저리거씨가 장시간 운전하느라 피곤할 것 같아 야영할 장소를 둘러보아도 풀이 무릅까지 차오르는 스텝지대다.
   
밤 12시가 넘으니 아예 지나가는 차량도 없다. 그런데 차 앞길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야생동물과 가축들은 왜 그리 많은지. 그림으로만 보았던 여우보다 더 작은 여우와 토끼들을 30여 마리 만났다. 풀숲으로 도망가면 될텐데 초원에 난 차량 바퀴 자국을 따라 줄기차게 도망가는 모습을 보며 웃느라 잠이 깼다.

GPS를 따라 운전했지만 몇 번이나 길을 헤매다 아예 야영을 포기하고 할힌골에 도착하니 새벽 3시다. 초원길 330㎞를 달려 무려 10시간 만에 가로등이 켜진 도시 할힌골에 도착했다. 마을에서 텐트를 칠 수는 없어 동네를 돌아보니 호텔이라고 적힌 글씨가 보여 전화를 하니 아주머니가 들어오란다.
 
 깜깜한 초원길을 10시간 달려 새벽 3시경에 찾아낸 할힌골의 호텔. 마트겸, 호텔겸, 가라오케였지만 날씨는 추워지고 창고같은 모습의 방이었지만 바람과 추위를 막아주는 것만도 감지덕지한 방이었다.
깜깜한 초원길을 10시간 달려 새벽 3시경에 찾아낸 할힌골의 호텔. 마트겸, 호텔겸, 가라오케였지만 날씨는 추워지고 창고같은 모습의 방이었지만 바람과 추위를 막아주는 것만도 감지덕지한 방이었다. ⓒ 오문수
 
창고 같은 문을 열고 들어가니 목제침대가 네 개 있고 식탁 하나가 중간에 놓여있었다. 피곤한 일행은 침대 위에 놓인 이불을 걷어내고 각자 지참한 침낭속으로 들어가 잠자리에 들었다. 동행한 고조선 유적답사단 안동립 단장이 침낭 속으로 들어가며 한 마디 했다. 

"바깥 날씨는 추워졌는데 불도 물도 화장실도 없지만 바람과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이곳이 천국입니다. 몽골 하늘에 5만개의 별이 떴으니 별 5만개짜리 호텔에서 잠자게 되어 행복합니다."

다음날 아침 늦잠을 자고 일어난 일행은 식탁에서 아침을 해먹고 밖에 있는 푸세식 화장실에 들렀다가 길거리로 나오면서 일행이 잤던 호텔을 바라보니 동네마트겸 호텔겸 가라오케를 겸한 가게였다. 일행은 여행 떠나면 개고생인 줄 아는 선수들이다. 웃으며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본 일행의 눈에 할힌골 박물관이 보였다.

박물관에는 제2차세계대전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던 할힌골(Khalkhin Gol)전투가 벌어졌던 당시의 상황과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한편 전투의 상대방이었던 일본은 노몬한Nomonhan)전투라고 기록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분기점이 된 할힌골 전투


만주 침략을 노리고 있던 일본은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켜 1932년까지 만주지역을 거의 장악하고 같은 해 3월 일본의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수립한 뒤 대륙침략의 전진기지로 삼는다. 만주(몽골 동부의 도르노드 아이막과 시베리아 접경지역)를 침공한 일본은 계속해서 서쪽으로 진격했다. 당시 일본은 시베리아를 통합하고 몽골을 장악해서 자국과 구소련 사이에 완충지대를 설정할 속셈이었다.
        
 할힌골 전투 당시 사망한 일본군 전사자 명단과 부상당한 몽골군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할힌골 전투 당시 사망한 일본군 전사자 명단과 부상당한 몽골군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 오문수
 
1939년 5월 몽골군 기병 80여명이 말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 할흐강을 건넜다가 일본군과 충돌한 사건이 벌어졌다. 몽골과 상호원조약을 맺은 소련군이 기계화부대를 투입시켜 일본군을 거의 궤멸시켜 버렸다. 그러자 일본군은 만주에 주둔한 항공기와 탱크병력을 동원해 대대적인 공격에 나섰다.
  
 할힌골박물관 옆에 전시된 무기들로 할힌골전투 당시 사용된 무기들이다
할힌골박물관 옆에 전시된 무기들로 할힌골전투 당시 사용된 무기들이다 ⓒ 오문수
  
 할힌골전투 승전탑 모습. 1939년 5월 11일부터 9.16일까지 벌어진 전투에서 소련과 몽골 연합군에 맞서 싸운 일본군과 일본 괴뢰국인 만주군 연합군이 거의 전멸하다 했다.  몽골인들은 이 승전비를 대단히 자랑스럽게 여긴다.
할힌골전투 승전탑 모습. 1939년 5월 11일부터 9.16일까지 벌어진 전투에서 소련과 몽골 연합군에 맞서 싸운 일본군과 일본 괴뢰국인 만주군 연합군이 거의 전멸하다 했다. 몽골인들은 이 승전비를 대단히 자랑스럽게 여긴다. ⓒ 오문수
 
반격에 나선 소련군이 대규모의 항공기와 기갑부대를 동원하자 일본 관동군은 기갑부대를 철수시켰고 남은 보병부대는 화염병과 대전차 총검술에 의존하는 자살공격에 나섰다. 전투에 동원됐던 일본군 23사단은 병력의 70~80%를 잃고 거의 전멸되다시피했다. 기갑부대에 맞서 화염병과 총검술로 대항한 어처구니 없는 일본군. 일본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 전투에 관해 쓴 글을 보면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다.
 
"노몬한(할힌골)의 패배는 일본인의 비근대적 전쟁관과 세계관이 소비에트라는 새로운 전쟁과 세계관에 의해 철저하게 격파되고 유린당한 최초의 체험이었다."
  
 박물관 정원에 일본인들이 세웠을 것으로 여겨지는 '세계인류 평화를 기원하는 ~"기념비와 뒤에 보이는 탱크가 아이러니하다. 전쟁을 먼저 일으켜놓고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모습에 쓴 웃음이 나왔다.
박물관 정원에 일본인들이 세웠을 것으로 여겨지는 '세계인류 평화를 기원하는 ~"기념비와 뒤에 보이는 탱크가 아이러니하다. 전쟁을 먼저 일으켜놓고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모습에 쓴 웃음이 나왔다. ⓒ 오문수
 
일본군을 완전히 격파한 소련은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동부전선에 있던 소련군을 서부전선으로 이동시켜 전선에 투입시켰다. 할힌골전투 종료 이튿날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해 유럽에서 2차대전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전쟁사가들은 말한다. 만약 일본군이 소련군을 이기고 소련군이 동부전선에 묶여있었더라면 세계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뉴스에도 송고합니다


#할힌골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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