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심원분들이 우리에게 법적으로 무죄를 선고하길 바라는 게 아닙니다. 양심의 문제로 무죄를 선고하길 바랍니다. 절도와 구조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구조할 권리'를 확립하는데 도움을 준다면, 기업은 자신이 관리하는 동물에게 조금 더 동정심을 가질 것이고 정부는 동물 학대 관련 문제제기에 조금 더 개방적인 자세를 보일 것입니다. 그럼 아마도, 적어도, '릴리'와 같은 아기돼지가 공장식 농장 바닥에서 굶어 죽어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웨인 슝(Wayne Hsiung) 활동가 최후 진술)
8일 오후 5시(현지시각), 미국 유타주 워싱턴 카운티 배심원단 8명은 절도죄로 기소된 동물권 직접행동 활동가 웨인 슝과 폴 피클시머(Paul Picklesimer)에게 만장일치로 무죄를 선고했다.
이들은 2017년 유타주의 다국적 육가공업체 '스미스필드'(Smithfield) 축사에 잠입해 심각한 부상을 입고 죽어가던 새끼 돼지 2마리를 구출해 절도 및 경범죄로 기소됐다. 이에 배심원단은 절도가 아닌 '구조할 권리'에 손을 들어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것.
이번 판결은 'DxE(Direct Action Everywhere)' 활동가가 무죄를 선고 받은 최초 사례다. 이번 사건 활동가들도 속해 있는 DxE는 전지구적 동물해방 풀뿌리 네트워크로 알려진 동물권 운동 단체다. DxE 활동가들은 2013년부터 축산업 시설이나 연구소에서 학대받거나 착취되는 동물을 직접 구출하는 '공개구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꾸준히 재판에 넘겨져 왔다.
기소된 2명의 활동가들은 각각 최대 5년 6개월의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었다. 이 재판은 유타주 법무장관실과 FBI 등 여러 기관이 5년 넘게 수사하고 재판 대응을 한 사건으로, 피해액이 100달러(한화 13만~14만 원)도 넘지 않는 단순 절도 사건에 FBI 수사관만 8명이 넘게 동원되면서 이례적이라는 비판을 산 사안이었다.
학대 동물 구출에 대한 무죄 선례가 남음으로써 이 논리가 미국 전역으로 확대될지에도 관심이 모인다. 활동가 웨인은 선고 직후 법원 밖의 기자들에게 "미국 남부 유타에서 일어날 수 있다면, 이제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동물을 구조할 권리?
사건의 시작은 2017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웨인을 포함한 DxE 활동가들은 스미스필드가 '가로 2피트(61cm) x 세로 7피트(213cm)' 크기의 돼지 임신 상자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켰는지 확인 조사를 나갔다. 그 과정에서 여전히 좁은 임신 상자에 갇힌 돼지들을 다수 발견했고, 특히 분만 상자에서 죽거나 썩어가는 새끼 돼지와 심각한 부상을 입고 바닥에 널브러진 새끼돼지들도 다수 확인했다.
이들은 이후 공장에 몰래 들어가 이전 조사에서 확인했던 심각한 상황의 새끼돼지 2마리를 이송해 밖으로 데려왔다. 이들은 돼지들에 릴리(Lily)와 리지(Lizzie)라고 이름 붙이며 구조 과정을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공개했다. 구출 과정에서 찍은 내부 영상까지 <뉴욕타임스> 보도로 함께 공개하며 구조할 권리를 전세계적으로 공론화했다.
이들의 공개 구조는 현행 법체계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운동이다. 대상 동물이 축산기업·연구소 등의 소유물이기에 허가 없이 이송하는 행위 자체가 절도, 건조물침입 등 범죄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이에 동물권 활동가들은 의도적으로 법의 규정을 넘는 비폭력 불복종 행동과 직접행동을 벌여 사회에 구조할 권리를 확립하려 한다.
동물권 투쟁은 대부분 다국적 축산업체를 겨냥하는데다, 동물권에 대한 법률가들의 인식도 저조해 법적 싸움 자체가 쉽지 않다는 평가가 많다. 은영 DxE 활동가는 10일 <오마이뉴스>와 통화에서 "초국적 기업 스미스필드는 어마어마한 비용이 드는 거대 로펌 변호사들로 진용을 꾸렸다"며 "또 (동물권 등의 문제에) 보수적인 지역 환경과 보수적인 판사를 만나 재판 과정도 쉽진 않았다"고 설명했다.
실제 재판 중 검찰은 '동물 복지' 언급에 대해 여러 번 이의를 제기했다. 유타주 5지방법원의 담당 재판장도 '이 사건은 동물권리가 아닌 절도에 대한 것이니, 재판 증거로는 새끼 돼지와 직접 관련된 것으로만 제한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재판장은 배심원단에 공포 등 부적절한 반응을 야기할 수 있다며 활동가들이 직접 찍은 농장 내부 영상 공개도 허용하지 않았다.
검찰은 아기 돼지를 '개당 42.20달러'로 계산해 총 84.40달러(약 11만~12만 원)을 절도 금액으로 계산하기도 했다. 활동가 측 증인으로 나온 수의사는 "이들을 살리는 데 필요한 수의학적 치료는 수백 달러의 비용이 들었을 것"이라며 표준 시장 가격지수로만 셈한 검찰을 반박했다.
재판 과정에선 담당 FBI 수사관이 스미스필드와 코스트코(대형마트) 경영진과 사건을 논의한 기록도 드러났다. DxE는 스미스필드가 2014년 공화당 법무장관 협회에 최소 1만410달러를, 2020년에는 현재 유타주 법무장관에 500달러를 기부했다며 주 법무장관과 기업 간 재정 관계에 대한 공개를 요구하며 싸웠다.
더욱이 재판 중 스미스필드는 사건이 벌어진 지역의 농장 규모를 3분의 1로 줄여 일자리를 감축하고 지방정부로 하여금 경제 비상 상태를 선포케 한다는 말을 직원들에게 전하기도 했다. 이에 동물권 활동가들은 지역 배심원단에게 편견과 편향을 심어준다며 적극 항의했다. 재판장은 '지역 여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언론의 집중 보도를 고려하면 작은 규모의 커뮤니티와 배심원 풀이 우려된다'며 인구 규모가 더 큰 인근 지역으로 배심원단을 옮겼다.
절도와 불법침입 등을 주장한 검찰에 변호인단은 '구출된 새끼 돼지들은 당시 죽을 위기에 있었고 스미스필드는 이런 돼지들을 정기적으로 버려왔으며, 돼지들이 회사 소유로 남았다면 가치가 없는 존재로 버려졌을 것'이란 변론으로 배심원단을 설득했다.
한국도 '도살장 가로막기' 사건, 대법원 계류 중
은영 활동가는 "결국 직접행동이 학대와 착취, 고통으로 얼룩진 축산업의 구조를 드러내면서 배심원들,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켰다"며 "직접 행동에 삶을 걸고 있는 사람들이 큰 희망과 가능성을 느낄 수 있는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한국도 현재 '구조할 권리' 사건 하나가 대법원에 계류돼있다. 한국 DxE 활동가들이 2019년 10월 4일 세계 동물의날을 맞아 동물권리장전을 주장하며 경기 용인의 한 도계장 입구에서 '록다운'(lockdown·도살장 등을 점거하는 운동) 시위를 벌였다. 활동가들은 200㎏ 무게의 시멘트로 가득 찬 여행 가방 안에 손을 넣고 결박했다.
이들은 생닭을 실은 트럭이 도계장으로 진입하는 것을 4시간 동안 막은 업무방해 혐의로 기소돼 2020년 8월 총 1200만 원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재판에서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는 과정에서 이뤄진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업무방해죄 구성요건으로서 '위력'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변론했다. 하지만 1·2심 모두 유죄 선고를 받았다.
은영 활동가는 "생살을 찢어내는 고문기구, 하루에도 수천 수만을 말살하는 학살체계, 비명과 절규, 이기적 욕망으로 가득 찬 축산업의 거대자본에 대해 누구도 얘기를 듣거나 생각하지 않기에 콘크리트를 덮고 도살장 앞을 가로막아야만 했다"며 "이러한 축산업은 더 이상 지속되어선 안된다. 부당함을 알기에 계속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