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한승헌 변호사
한승헌 변호사 ⓒ 정대희
 
나와 이 세상과의 만남은 초장부터 불황이었다. 우선, 내가 태어나서 유년기를 보낸 1930년대는 일제의 식민지 수탈로 시운의 맥이 빠져버린 시기였다. 태평양전쟁의 침략놀음이 한반도를 더욱 옥죄었으며, 일본이 패전할 기미가 보이자 온갖 말기증세가 기승을 부렸다. 징병이나 징용으로 많은 남자들이 끌려갔으며, 부녀자와 어린 것들은 전시 통제와 가난에 시달리면서 연명을 해나가는 참상을 면치 못했다.

산간부의 농촌지역은 더욱 생기를 잃어갔고, 농민계층은 기아에 허덕였다. 농작물의 강제 공출 등으로 하루 세 끼를 때우지 못하는 집이 늘어갔다. (주석 1)

1934년 9월 29일 아버지 한상규와 어머니 이종단 사이에서 태어났다. 전북 진안군 안천면 노성리에서, 혹독한 시기였다.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지 24년, 조선8도 어느 곳이라도 어렵지 않는 지역이 없었지만 농촌의 살림은 특히 어려웠다. 

그가 태어나던 해 조선총독부는 '조선농지령'을 공포하여 농민들을 더욱 쥐어짜고 소작쟁의 등 저항운동을 탄압했다. 그런 속에서도 한 해 전에는 조선어학회가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발표하는 등 애국지사들은 끝까지 민족정신을 지키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책상물림의 유생(儒生)이자 농부였다. 우리 고을에서는 한학(漢學)으로 아버지만큼 유식한 이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집안에서나 고장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아버지를 찾아오곤 했다. 애경사(哀慶事) 때에 제문, 축문, 혼서지 같은 것에서부터 하다못해 지방(紙榜)이나 편지의 대필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의 봉사(?) 범위는 상당히 넓었다.

그렇다고 세도가 당당하거나 똑똑한 선비로 처신하신 것은 아니었다. 좀 무엄하게 평하자면 무골호인형의 인간이셨고 책과 붓만을 벗 삼아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기에 문약(文弱)을 무릅쓰고 농사일을 하시는 한편 나무하러 산을 오르내리시기도 했다. (주석 2)

어머니는 생활력이 강하여 자식의 학비 마련과 빈곤 타개를 위해 시장에 나가서 장사를 하기도 하였다. 과묵한 아버지에 비해 어머니는 당신의 생각이 분명한, 해학으로 사람들을 웃기기도 하였다고, 한승헌은 기억한다. 그의 유머는 어머니의 유전자를 닮은 것 같다.

부모는 9남매를 출산했으나 모두 어려서 잃고 한승헌만 살아남았다.

"무녀독남 외 아들이었던 나는 외로우면서도 귀하게 자랐다. 곁에서 도와줄 형제가 없으니까 매사를 스스로 알아서 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자립심이 강해졌다." (주석 3)

그는 성장하여 사회활동을 하면서 가끔 자신이 '실향민'이라 하였다. 사연인즉 "2001년 가을에 준공된 용담다목적댐 때문에 고향이 수몰되어버렸다. 6개 면이 물에 잠기고, 2,864세대 1만 2천 명의 이주민이 대대의 삶의 터전을 떠나야 했다." (주석 4)

북녘에서 온 실향민들은 통일이 되면 찾아갈 고향이 있으나 자신은 고향이 물속에 잠겨 있어서 심청이 용궁 찾아가듯 물속으로 잠수해 들어가서나 가능하다는 아쉬움이었다. 

아버지는 한때 함경북도 경흥에 있는 탄광에서 노무서기로 일하였지만 돈을 벌지 못한 채 귀향하여 가정은 언제나 어려웠다. 어머니가 억척스럽게 노동하여 생계가 근근히 유지되었다. 6세이던 1940년 4월 향리에 있는 안천국민학교에 입학했다.(국민학교는 당시 호칭) 한 학년 평균 30명 남짓 전교생 200명 안팎의 작은 학교였다. 일본인 교장과 3명의 한국인 교사가 두 학년씩을 맡아 가르쳤다. 

4학년 때 전주에 있는 아이오이(相生) 국민학교(현 전주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중학교 진학을 위해서는 도시에 있는 학교에 가서 공부해야 한다는 부모님의 결단이었다. 아직 어린 나이에 부모 곁을 떠나 전주 숙부 댁에서 기식을 하며 낯선 학교에서 공부한다.

일제 말기여서, 학생들은 공부 대신 송진 채취를 위한 솔뿌리캐기와 모심기 등 노력 동원 그리고 수업을 중단하고 방공호로 대피하는 연습 등 혼란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한승헌(韓勝憲)이란 이름은 아버지의 글 친구가 지어주었다. 항렬자인 '헌(憲)' 자를 넣어 지은 것이다. 성장하여 변호사가 되었을 때 이름과 관련 '비화'가 있다. 

"어떤 이는 내 이름이 법률가 또는 법조인으로 안성맞춤이라고 덕담을 한다. 법 헌(憲) 자와 이길 승(勝) 자가 함께 있으니, 법대로 해서 이긴다는 뜻 아니냐고도 한다." (주석 5)

그런데 이름 때문에 엉뚱하게 고통을 겪기도 했다. 시대의 소극인지 비극인지 모를 일이 벌어졌다.

"무슨 시국사건으로 '남산'(당시 중앙정보부 별칭)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을 때의 '희극'이었다. '당신 이름이 이게 뭐요, 한승헌이라, 그러니까 한국의 (유신)헌법을 이기겠단 이 말이야?'" (주석 6)


주석
1> <자서전>, 25쪽.
2> 한승헌, <불행한 조국의 임상노트, 정치재판의 현장>, 23쪽, 일요신문사, 1997.(이후 <정치재판의 현장> 표기)
3> 한승헌, <자서전>, 27쪽.
4> 앞의 책, 25~26쪽.
5> 앞의 책, 21~22쪽.
6> 앞의 책, 20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양심 한승헌 변호사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한승헌#시대의양심_한승헌평전#한승헌변호사평전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