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잠 자는 시간에 핸드폰 알림을 꺼놓는 나는 아침을 먹고 나서야 그 소식을 알게 되었다. 23명이 참석하고 있는 단톡방에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문자가 빼곡히 올라와 있었다.
코로나 시대라서 얼굴 본 지가 오래 되어 친구의 안부를 몰랐던 나는 아, 하는 탄식이 먼저 새어 나왔다. 부모님이 돌아가신다는 것은 막막한 슬픔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밀려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친구도 지금 그렇겠구나, 하얗게 핏기가 사라지고 있는 아버지의 주검을 보며 눈물이 흐르겠구나,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감당이 안 돼 엉엉 울지도 모르겠구나, 그 와중에 남은 가족들과 어떻게 장례를 치를 것인지, 이것과 저것은 어떻게 해야 할지 선택하고 결정하고 있겠구나, 싶었다.
나는 문상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고속버스를 타고 터미널에서 내려 지하철을 갈아타고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어젯밤에 아버지를 잃은 친구는 평소의 활달함은 사라지고 기운이 빠져 슬픔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문상객을 맞이하는 친구의 모습에서 나는 4년 전에 치렀던 나의 아버지 장례식이 떠올라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친구의 손을 잡았다.
친구의 아버지는 85세이신데 간암 4기 확진을 받은 지 3주 만에 운명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를 보내드리는 과정을 이야기하면서 친구는 슬퍼했고 안타까워했다. 자신이 아버지를 위해서 뭘 해 드린 것도 없고 코로나 상황이라 더 힘들게 아버지를 보내드려야 했던 것들에 대해 얘기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부모님을 두 분 다 보내드린 나는 친구의 아픔과 슬픔을 너무나 잘 이해한다. 함께 한 시간이 많은 만큼 친구는 아버지를 보내드리는 과정이 힘들고 아플 것이다. 장례를 다 치르고 집에 가면 아버지를 잃은 슬픔이 복받칠 것이고 또 시간이 지나서도 언제 어느 때든 갑자기 아버지가 떠올라 그리움과 아쉬움 같은 감정들이 차고 올라올 것이다.
문상객이 되어 장례식장에 모인 우리는 친구를 위로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친구의 아버지가 어떻게 사셨고 어떤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 들으면서 고인을 추모했다. 장례 방식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나누기도 했다. 파릇파릇한 스무 살에 만나 오십 중반의 나이가 된 우리에게 자신의 장례에 대해 구체적인 얘기를 나누는 것은 어느덧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더구나 작년에는 우리의 친구를 한 명 떠나보넀으니 죽음이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고 각자 자신의 일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죽은 이의 시신을 마지막으로 처리하는 방식이 장법이다. 우리나라는 시신을 땅 속에 묻는 매장을 하거나 불에 태우는 화장을 주로 한다. 그 외에도 장법에는 시신을 지상에 노출시켜 자연적으로 소멸시키는 풍장이나 시신을 물속에 넣거나 배에 태워 바다나 강으로 흘려보내는 수장이 있다.
어떤 티베트인들은 시체를 새들에게 내어주는 조장을 한다. 산 중턱까지 가져간 시체를 해체해 새가 먹을 수 있도록 해 놓는 것이 조장이다. 하늘을 신성시하는 티베트인들에게 육체는 새에 의해서 하늘로 운반된다는 생각이 담긴 장례 풍습이다.
16세기에 몽테뉴가 쓴 <에세>를 보면, 어떤 신대륙인들은 죽은 이의 시체를 먹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가까운 가족의 시신을 먹음으로써 자신의 몸 속에 죽은 이의 몸과 영혼을 받아들인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그들은 고인을 자연으로 보내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몸속으로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추모한 것 같다. 문명의 옷을 걸친 지 이미 오래된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는 꽤나 충격적이고 야만적인 풍습인데, 나는 그들의 풍습이 동물성과 인간성이 원시적으로 결합된 추모의 형태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전 우리나라의 장법은 매장이 주로 행해졌고 화장은 불교에서 승려들이 열반했을 때 혹은 연고가 없는 시신들에게 행해졌다. 하지만 장지가 부족하고 묘지 관리가 어려워진 현재 우리나라에서 화장의 비율은 전체 장례의 90% 가까이 되었다.
우리는 매장보다는 화장에 대한 얘기를 더 많이 했는데 어떤 친구는 화장한 후 바다나 강이나 산에 뿌려지기를 희망했다. 어떤 친구는 수목장을 하고 싶다고 한다. 수목장은 뼛가루를 나무 뿌리에 묻는 방식이므로 자연친화적인 장법이라 생각되는데 나도 수목장으로 나의 장례를 치르고 싶다.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게 이치니까 흙과 함께 나무의 거름이 되어 나무의 일부분이 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살아있는 자들이 이미 세상에 없는 내가 그리울 때 조금씩 자라고 있는 나무를 보며 가끔씩 나를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엄마가 남기고 가신 난초와 선인장에 지금도 물을 주면서 가끔씩 내가 엄마를 그리듯이 말이다.
아버지를 여읜 친구는 살아가면서 때로는 그리움과 애틋함으로 때로는 슬픔이나 회한으로 아버지를 느낄 것이다. 살아있는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고인을 추모하고 살아있음으로 우리는 각자의 장례식 연습을 한다, 상실의 슬픔과 위로를 나누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