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문을 연 한국해양과학기술원 부설 극지연구소인 남극 세종과학기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남극 과학기지다. 남극 대륙 북쪽에 있는 사우스 셰틀랜드 제도의 킹 조지 섬 바톤 반도에 있다.
지난 2003년 12월 7일, 실종대원을 구조하러 나갔던 전재규 대원은 남극의 바다에서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이날 중국 장성기지에서 부족한 물품을 구해 보트를 타고 돌아오던 3명의 대원은 블리자드(남극지방에서 일어나는 거세고 찬 바람을 동반한 눈보라 현상)를 만났다. 불과 몇 미터 앞을 볼 수 없는 폭풍우가 몰아쳤고 해안가 바로 근처서 보트가 내동댕이쳐졌다.
대원 한 명은 해안에 떨어졌지만 다른 대원들을 해안가 얕은 바닷물에 빠졌다. 구명복을 입었지만 바닷물을 완벽하게 막아주지 못한 탓에 옷이 젖었고,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끔찍한 3일을 보내야 했다. 대원들은 살아남기 위해 졸음으로 힘겨워하는 서로를 끊임없이 깨웠으며 기지에서 구조팀을 보내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어려움을 견뎌냈다.
세종기지에서도 실종대원을 구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날이 좋지 않아 가까운 섬에 비상 상륙하겠다'는 마지막 교신을 듣고 부랴부랴 구조팀을 꾸렸다. 한여름이지만 블리자드로 체감온도는 영하 20℃ 이하로 내려간 상태였다.
구조팀을 실은 보트는 실종대원을 찾기 위해 바다로 나아갔지만 거센 파도에 휩쓸렸다. 이때 전재규 대원이 바닷물에 빠졌다. 흔들리는 배안에서 통신장비를 지키느라 보트를 꽉 잡지 못해 일어난 사고였다. 실종대원들과의 교신을 위해서는 통신장비를 안전하게 지켜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의 시신은 사고가 발생한 지 한참 후에야 차가운 남극의 바다에서 인양됐다. 남극 세종기지가 설립된 이후 발생한 첫 인명사고였다.
전재규 대원은 머나먼 타향 남극에서 안타깝게도 목숨을 잃은 유일한 대원이 됐다. 하지만 그의 의로운 죽음으로 실종된 3명의 대원은 동상에 걸렸지만 안전하게 기지로 돌아왔다. 자식을 가슴에 품은 전재규 대원의 부모도 의로운 희생으로 대원들을 지켜낸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의 유해는 곧 국내로 송환됐지만 예기치 않은 논란이 일었다. 유족은 전재규 대원을 국립현충원에 안장하길 바랐지만 정부는 기준에 맞지 않는다며 난색을 표했다. 결국 그의 유해는 강원도 영월의 한 사찰에 봉안됐다. 그러다 국립묘지법 안장대상 기준이 바뀌었고 사고가 난 지 4년 남짓한 2007년 10월 13일, 전재규 대원은 국립대전현충원 의사상자 묘역에 안장됐다.
전재규 대원의 희생은 우리나라 극지연구사에 하나의 밀알이 되었다. 우리나라 첫 쇄빙선 건조에 불을 붙인 것이다. 당시 남극 현지에 한 방송사 취재팀이 취재 중이어서 급박했던 현장 상황을 안방에 전달할 수 있었는데, 고무보트에 의지한 대원들의 열악한 상황이 보도됐고 여기에 대한 정부 대책이 요구됐기 때문이다.
사고 이틀 뒤, 정부는 쇄빙선의 건조를 앞당겨 조기에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 쇄빙선을 빌려 썼는데, 60일에 15억 원의 임대료를 내야 할 정도로 비쌌다.
또 한국해양연구원의 일개 부서였던 극지연구부를 연구원의 부설 극지연구소로 승격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고 재발 방지와 본격적인 극지연구 착수라는 임무가 주어진 것이다.
그로부터 6년 뒤, 대한민국의 첫 쇄빙선인 아라온호가 바다에 떴다. 바다의 순우리말인 '아라'와 전부를 뜻하는 '온'이 합쳐 이름이 되었고, '전 세계 모든 바다를 누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남극세종기지 앞에선 매년 12월 7일이면 전재규 대원의 흉상 앞에 모여 그의 희생을 기린다. 전 대원의 흉상 옆에는 태극기가 달린 국기봉을 비롯해 세종기지 표지석, 솟대, 장승이 함께 세워졌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미디어마당사회적협동조합 누리집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