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25일 오전 국회를 찾아 2023년도 예산안 및 기금운용계획안에 대한 시정연설을 했다. 취임 이후 두 번째 시정연설이었지만, 더불어민주당은 전면 불참한 '반쪽짜리'였다. 다음 세 장면은 새 정부 출범 반년도 채 되지 않아 벼랑 끝에 몰린 '협치'의 주소를 명징하게 드러냈다.
[#장면①] 18분 동안 19번 박수가 터졌다
박수가 1분에 한 번 꼴로 터졌다.
윤석열 대통령이 시정연설을 하는 동안이었다. 윤 대통령의 시선은 주로 국민의힘 의원들이 앉아 있는 본회의장 왼편을 향했다. 원고를 읽어 내려가다가 고개를 들어 본회의장 오른편을 보기도 했지만, 텅 빈 의석 탓인지 시선은 빠르게 여당 의원 쪽으로 옮겨갔다.
여당 의원들은 연설이 끝나자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열렬히 박수를 쳤다. 윤 대통령은 김진표 국회의장에게 목례를 한 후, 곧장 야당 의원들이 주로 앉는 본회의장 오른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이 윤 대통령을 맞아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나눴다. 여기까지였다. 그 뒤에 윤 대통령과 악수를 나눈 이들은 모두 국무위원들과 여당 의원들이었다.
윤 대통령은 연설 때만 하더라도 정의당 의원들의 의석을 힐끔 쳐다보기도 했다. 그러나 멈칫 하더니 이내 몸을 돌렸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국무위원들과 악수를 마친 윤 대통령을 박수와 환호로 맞이했다. 대통령이 지나갈 통로 쪽으로 모두 모여든 상태였다. 윤 대통령은 일일이 여당 의원들과 악수를 나눴다. 정진석 비상대책위원장과 주호영 원내대표 등과는 양손을 맞잡았고, 동선에서 조금 떨어져 있던 장제원 의원을 발견하곤 등을 두드리고 장 의원의 귓속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윤 대통령을 배웅한 뒤 기자들을 만난 정진석 비대위원장은 시정연설에 불참한 민주당을 강하게 성토했다. 그는 "20년 이상 정치하면서 대통령 국회 시정연설을 이렇게 무성의하게 야당이 대하는 걸 본 적이 없다"며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은 선택사항이나 재량사항이 아니라 의무다. 국민을 향한 연설이다"라고 비판했다. 특히 정 위원장은 민주당의 시정연설 불참 이유를 이재명 민주당 대표 등을 향한 검찰 수사를 막기 위한 정치적 의도라고 주장했다.
"절대 다수 의석을 가진 민주당이 그 입법권을 당대표 범죄 은폐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런 사법의 정치화는 의회 민주주의의 본령인 대화와 타협을 실종시키는 동시에 정쟁을 양산시키는 쪽으로 연결된다. 아주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정연설 중 한쪽이 텅빈 의석을 바라보면서 제가 느낀 소회다."
[#장면②] "야! 정의당! 웬만큼 해라, 웬만큼"
"야! 정의당! 웬만큼 해라, 웬만큼"
윤석열 대통령이 국회 본회의장에 입장하기 전, 국민의힘 의원들 중 누군가가 정의당 의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정의당 의원들이 좌석 앞에 부착한 "부자감세 철회! 민생예산 확충!" "이XX 사과하라!" 피켓에 대한 힐난이었다. 류호정 정의당 의원이 "이 정도도 고마운 줄 아세요!"라고 맞섰지만, 여당 의원들 쪽에선 "예의를 지켜라. 예의를!"이란 고성이 곧장 나왔다. 강은미 정의당 의원은 그런 여당 의원들을 향해 "사과하세요"라고 소리쳤다.
정의당 의원들은 이날 전원 본회의장에 착석해 윤 대통령의 시정연설을 들었다. 그러나 본회의장에 들어서는 윤 대통령을 기립박수와 환호로 맞이한 여당 의원들과 달리, 자리에 착석한 채 침묵으로 항의 의사를 분명히 표했다. 윤 대통령의 연설이 끝났을 때는 대통령의 인사를 기다리지 않고 본회의장에서 모두 퇴장했다.
이와 관련 이은주 정의당 원내대표는 연설에 앞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지금 국회는 끝없는 극단적 정쟁으로 국감마저 수차례 파행되는 등 정치 자체가 실종됐다. 그리고 정치 중단 사태의 정점에는 윤 대통령이 있다"면서 윤 대통령이 지난 9월 뉴욕 순방 중 비속어 발언으로 국회를 모욕한 데 대해 사과해야 한다고 촉구한 바 있다.
그는 "정부 출범 이후 거듭된 인사 실패, 정책 실패, 국정 무능에도 윤석열 대통령은 단 한 번의 사과도 하지 않고 있다. 국회 파행과 극단적 정쟁이야말로 윤석열 대통령이 바라는 바이며, 국회가 그런 윤 대통령의 의도에 끌려가서는 안 된다"면서 "정의당은 오늘 본회의 시정연설에 참석해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계속된 무능과 실패에 단호히 항의하겠다"고 밝혔다.
[#장면③] "아예 보지 않았습니다"
민주당은 국회 본회의장에 입장도 하지 않았을 뿐더러, 중계 화면을 통해서조차 윤석열 대통령의 시정연설을 보지 않았다. 대통령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연설하는 동안, 민주당 의원들은 예산결산특별위원회 회의장으로 들어가 별도의 의원총회를 가졌다. 연설이 진행되는 동안 "정기 국회동안의 특히 예산안 관련 앞으로의 대응 방안을 논의했고, 정기국회 과정에서의 입법 과제를 논의"했고 "국정감사를 마무리했는데 후속 과제 등에 대해서도 논의"했다는 것이 오영환 민주당 원내대변인의 설명이다.
오 원내대변인은 기자들에게 민주당이 시정연설 보이콧 차원에서 연설 장면을 아예 보지 않았음을 전하며 "시정연설에 대한 내용상의 평가는 차후 논평과 정책위의장 기자 간담회를 참고해달라"라고 덧붙였다.
민주당은 이날 이른 시간부터 윤석열 대통령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국회무시 사과하라!" "이 XX 사과하라" 등의 문구가 쓰인 손피켓을 들었고, 제일 앞에 놓인 펼침막에는 "국감방해 당사침탈 규탄한다"라고 쓰여 있었다. 이들은 윤 대통령 입장 직전까지 "민생외면 야당탄압 윤석열 정권 규탄한다!" "국회모욕 막말욕설 대통령은 사과하라!"와 같은 구호들을 외쳤다.
이후 윤 대통령이 국회의사당에 모습을 드러내자, 민주당 의원들은 침묵으로 항의의 뜻을 강하게 밝혔다. 몇몇 이들이 산발적으로 대통령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민주당 의원들은 침묵을 지키며 피켓을 들어 보였다.
윤 대통령이 국회를 떠난 직후, 민주당 의원들은 다시 한 번 로텐더홀에 모여서 같은 구호를 제창했다. 진성준 민주당 원내수석부대표는 "오늘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셔서 감사드린다"라며 장내를 정리했다. 박홍근 원내대표는 이후 기자들에게 "원내에서 더 강하게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제1야당의 대통령 시정연설 불참은 처음... 불신 어떻게 풀까
야당이 대통령 시절연설에서 정치적 항의를 드러낸 사례는 수차례 있었지만, 아예 본회의장에 들어가지 않고 연설을 전면 보이콧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2004년 10월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정연설 당시 제1야당이던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 의원들은 연설 중 본회의장을 빠져나가는 방식으로 연설을 보이콧했다. 해외 순방 중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역사는 퇴보한다"고 말한 당시 이해찬 국무총리가 시정연설을 대독하면서 사과도 하지 않자, 강하게 불만을 드러낸 것이었다.
한편, 김진표 국회의장은 이날 시정연설 전 사전환담 때 윤 대통령에게 "날씨가 좀 쌀쌀해진 것 같다. 그런데 여의도 날씨가 훨씬 더 싸늘한 것 같다. 오늘 아침 국회 모습이 가장 좋은 모습으로 국민들께 비쳐야 할 텐데, 국회의장으로서 송구스러운 마음"이라고 유감을 나타냈다. 김 의장은 그러면서 내년도 예산안을 통해서라도 여야간 협치를 복원했으면 한다는 뜻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