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 밤중에 방 청소를 시작했다. 정리정돈이 두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유튜브 영상을 본 뒤였다.
영상에 따르면, 어지러운 방은 의식하지 못하는 동안에도 지속적으로 뇌의 시각피질을 자극한다. 휴식을 취해야 하는 집에서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뇌가 피로해져 일상에서의 집중력이 저하된다. 한편 정리정돈은 뇌의 각성 수준을 높여 활력을 부여하고, 주변 환경에 대한 통제감을 준다. 내 상황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은 동기 부여로 이어진다.
나에게는 정리가 시급했다. 안방 한켠에는 아기용품이 중구난방으로 쌓여 있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잠들기 직전까지도 기저귀가 쌓인 선반을 보며 몇 팩이나 남았는지, 언제쯤 주문해야 할지 생각했다. 개지 않은 옷과 양말, 수건 등은 빨래바구니 속에 뒤엉켜 있었다. 매번 그 산더미를 뒤적여 옷을 찾아 입은 게 벌써 한 달째였다.
현대인이라면 으레 꿈꾸는 '정돈된 삶'
나라고 늘 이러고 산 건 아니었다. 청소와 정리정돈이 안 되는 건 우울증 환자의 특징이기도 하다.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씻거나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데 방 청소를 할 수 있을 리 없다.
약을 먹기 시작한지 닷새쯤 지나니 엉망이 된 방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마침 정리에 대한 유튜브를 보게 된 거였다.
아니, 나는 늘 정돈된 삶을 꿈꿔 왔다. 미니멀 라이프를 꿈꾸지만 오늘도 수많은 잡동사니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그러지 않는가?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정리정돈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계정을 구독하며 대리만족을 얻으면서.
유명한 정리 컨설턴트인 마리에 곤도가 출연한 넷플릭스 시리즈도 전부 봤다. 덕분에 의욕을 얻어 주방 한 귀퉁이나 화장대를 말끔하게 정리하고서 기분이 산뜻해진 경험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고 나자 정리는 뒷전이 됐다. 매일 반복되는 젖병 설거지, 빨래, 장난감 살균소독 등 육체노동에 지쳐 다른 집안일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아기 개월 수에 맞춰 옷이니 욕조니 의자니 장난감이니 하는 것들을 계속 바꾸어줘야 하니 짐은 계속 늘고, 집은 어수선해져 갔다.
그 와중에 무기력과 우울의 늪에 풍덩 빠져버렸으니, 집안 꼴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며칠간 약을 먹다가 갑자기, 우연히 정리 유튜브를 보고 청소를 하고 싶어진 게 아니라, 나는 늘 정리가 하고 싶었다. 약을 먹으면서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리자 비로소 그걸 할 수 있는 기운과 의욕,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이다.
더 이상 설레지 않는다면 보내주자... "그동안 고마웠어"
먼저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물건들을 치웠다. 빨래바구니에 넣지도 않고 널브러져 있던 옷들을 모아 세탁기에 집어넣었다. 각종 아기용품 상자, 종이가방 들을 분리수거해 버리거나 접어서 한데 모아두었다. 걸을 때마다 발길에 채이던 물건들이 사라지니 방이 한결 넓게 느껴지고, 쾌적해졌다.
내 책상을 가지고 들어오면서 많이 치우기는 했지만 여전히 안방에는 선반 두 개가 가득 차도록 아기용품이 있었다. 아기 방으로 옮길 수 있는 것들은 최대한 옮기고, 선반에는 가림천을 달아서 자질구레가 눈에 들어오지 않게 했다. 나의 시각피질을 자극하지 않도록!
언젠가 쓸까 하고 못 버리고 있던 물건들도 많이 정리했다. 훗날을 위해 물건을 보관하는 것도 에너지가 드는 일이다. 나중에 꼭 필요하게 되면 그 때 다시 산다는 생각으로(물론 그런 일은 생기지도 않는다) 처분했다.
이제는 사이즈가 맞지 않거나 취향이 변해서 안 입게 된 옷들도 친구들에게 나눠주거나 의류수거함에 넣어버렸다. '다시 입을 수 있을까? 입을지도 몰라' 대신 '입고 싶은가? 설레는가?'를 기준으로 결정하니 좀 더 쉬웠다.
평소 넷플릭스 시리즈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를 애청한 것이 정리 과정에 도움이 되었다. 마리에 곤도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정리할 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작별인사를 하라고 권한다. 잘 쓰던 물건이지만 이제 필요가 없어졌다는 이유로 한순간에 쓰레기 취급하는 게 아니라, '그동안 고마웠어'라는 인사를 전하며 곱게 이별하라는 것이다.
애물단지가 된 지 오래지만 외국 여행에서 사온 기념품이라거나 친구에게 선물 받았다거나 한동안 즐겨 입던 옷이라거나 하여 애착이 있는 물건들을 정리하는 데 이런 방법이 유용했다.
아기에게도, 어른에게도 필요한 삶의 통제감
심리학자 김경일은 '절대 대청소를 하지 말라'고 했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일을 해치우려다보면 부담감이 생기고, 무리한 계획을 끝내 완수하지 못하면 좌절감을 느끼고 자기효능감을 상실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루에 서랍 하나씩, 냉장고 한 칸씩 정리한다는 식으로 작은 목표를 세우고 매일 그것을 완수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롭다고 조언했다.
방 청소 다음은 거실과 주방이었다. 엉망진창인 집안.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겠다. 머리가 혼란스러워 자주 소파에 주저앉았다. 싹 다 뒤집어엎고 새로 시작하고 싶지만, 인생에 리셋은 없는 법. 싹 다 뒤집어놓으면 뒷수습도 쉽지 않다. 삶은 계속되고, 오늘도 여기서 아기를 돌봐야 한다. 아이가 하원하기 전에 마무리 지을 수 있을 정도로만 뒤엎자.
그렇게 조금씩 정리하면서 비로소 뭔가가 내 의지대로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무기력과 우울 속에서 허우적대며 나는 내 삶에 대한 통제감과 유능감, 자기효능감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육아는 항상 내 의지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설거지만큼은 내 의지만큼 마음에 들게 깨끗이 할 수 있지 않은가.
요즘 우리 아이는 걷는 데 재미가 들렸다. 처음 스스로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그 우쭐한 표정을 잊지 못한다. '나 이런 것도 할 수 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에서 시작해 어느 순간 열두 걸음을 넘어지지 않고 걷게 됐을 때, 자기가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기쁜지 뿌듯함 가득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아기는 자기 신체를 스스로 통제하고 새로운 신체 기술을 익히며 유능감과 자기효능감을 형성한다. 그것이 영유아기 발달 단계에 꼭 필요한 과업이라고 한다. 아기를 키우다보면, 결국 어른도 아기와 다를 바가 없다는 걸 자주 느낀다. 내 삶을 스스로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 나 이런 것도 할 수 있어요, 라는 뿌듯함. 이런 걸 자주 느끼면서 살아가는 게 행복한 인생이라는 걸, 나는 아기를 키우면서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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