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 오후 2시, 여수 이순신도서관 다목적강당에서 '이순신재단 설립 운영에 관한 법률안' 국회 통과와 재단 여수 유치를 위한 시민공청회가 열렸다. 여수시의회 김영규 의장과 진명숙 의원이 주최하고 (사)여수여해재단(이사장 강용명, 학교장 서천석)이 주관한 이날 행사엔 70여 명의 시민이 참석했다.
좌장으로 나선 여수여해재단 강용명 이사장은 이순신 재단을 여수로 유치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이후 이순신리더십연구소장이자 해군사관학교 명예교수인 임원빈 박사가 주제 발제에 나섰다.
임원빈, "지역별로 재단 유치전 벌일 게 아니라 정부 차원의 컨트롤타워 필요"
"이순신 장군은 우리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적 위인"이라고 말문을 연 임원빈 박사는 이순신 선양의 역사적 사례를 들었다.
1598년 11월 19일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자 선조는 비변사에 즉시 사당 세울 장소를 물색하라고 명했다. 임금의 명을 받은 비변사에서는 다음날 전라좌수영에 이순신 사당을 세우는 것이 좋다고 건의해 국가 차원의 최초 사액 사당인 충민사(1601년)가 설립된다. 사액 사당이란 조선시대에 임금이 지은 이름을 새긴 편액을 내린 사당을 말한다. 임원빈 박사가 힘주어 말했다.
"비변사에서 하루 만에 이순신 사당 건립지로 전라좌수영을 선택한 것은 전라좌수영이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의 본영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상식적 관점에서 봤을 때도 국가 차원의 최초의 사액 사당 후보지로 이의가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순신 사액 사당 건립은 선조가 지시한 충민사 이후에도 계속됐다. 일제강점기 서원철폐령에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통영충렬사(선조 39, 1606년), 인조가 이순신에게 시호를 내린 남해 충렬사(인조 10, 1633년), 아산 지방 유생들의 상소로 세운 아산 현충사(숙종 30, 1704년)가 왕들이 내린 사액사당이다.
현재 전국에 산재해 있는 이순신 관련 사당은 20여 개로 조선 조정에서 주관했던 핵심 사당이 4개이고 민간에서 주관했던 사당이 16개 정도 된다. 박정희 정권 시기에는 대통령의 지시사항으로 국가 차원의 대대적인 이순신 선양 사업이 진행됐지만 박정희 대통령 사후 이순신 선양 사업은 자취를 감췄다.
1995년 지방자치 시대가 열리면서 지자체를 중심으로 서서히 이순신 선양 사업이 활기를 보이기 시작했다. 때맞춰 각 지자체에서는 이순신 아카데미, 이순신 전적지 탐방, 전공학과 개설 등이 이뤄지고 있다. 임 박사가 말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노무현재단' '김구재단' 정주영 (아산문화재단)' 등 유명 정치가와 기업가를 기리는 수많은 재단들이 있지만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이순신을 선양하는 재단이 없어요. 이순신 선양을 위한 몸통과 팔 다리는 있는데 머리가 없어요. 특정 개인이나 그룹, 특정 정치 성향 중심으로 이순신 선양 사업을 벌일 게 아니라 국가 차원의 컨트롤타워가 필요합니다."
주제 발제를 마친 임원빈 박사에게 청중 한 명이 "통영이 초대 통제영이라고 주장하는 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묻자 그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초대 통제영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난중일기>에 여수를 '본영'이라고 썼고 한산도는 삼도수군통제영에 속한 전진기지일 뿐입니다. 이순신 장군과는 아무관계가 없습니다."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해 해군사관학교 학생들에게 강의를 한 그의 답변에 청중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무대에 등단한 이는 (사)여수여해재단 오병종 사무처장. 그가 발제한 주제는 '이순신재단 설립 운영 법률안 국회 발의 현황'이다. 현재 국회에 발의된 이순신재단 설립 안건은 3건이다.
송영길 의원(전 의원) 등 11인이 발의한 안건(2020.11.10.), 이명수 의원 등 13인이 발의한 안건(2020.11.26.), 신원식 의원 등 16인이 발의한 안건(2021.6.25.)
세 국회의원에 의해 발의된 안건은 모두 유사하다. 이순신 재단에 이사장 1명을 포함한 20명 이내의 이사와 감사 1명을 둔다는 내용이다. 다른 점은 신원식 의원과 송영길 의원의 안건은 "이사장은 이사장 추천위원회가 추천하는 사람 중에서 국무총리가 임명하도록 한다"는 것이었지만 이명수 의원 안건은 "이사장은 문화재청장이 임명한다"는 내용과 함께 이순신재단을 아산시에 설립한다고 명기했다.
민덕희 여수시의원, 당연히 여수에 이순신재단이 설립되어야
이어진 발표자는 여수시의회 민덕희 의원이었다. 다음은 민덕희 의원 발표 내용이다.
"우리 여수는 조선수군에게 전쟁물자를 제공하고 목숨 바쳐 나라를 구한 삼도수군통제영 본영이 있던 곳으로 이순신이 당당하게 개선했던 곳이기에 여수에 이순신재단이 설립되어야 합니다."
마지막 발표자는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이었다. '송영길·이명수 의원 제안 법률안의 문제점과 대안"이란 주제로 발표한 그의 이야기다.
"송영길 의원은 고향이 고흥으로 이순신 재단을 고흥 또는 여수에 재단설립을 염두에 둔 것 같으며 충남 아산시가 지역구인 이명수 의원은 이순신 재단을 아예 충남 아산시로 못박고 있어 곳곳에서 상충되고 국회 통과도 어렵게 만드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순신재단을 국무총리가 아닌 문화재청 소관으로 두는 게 보다 바람직하다"고 말한 노성태 원장은 한 가지를 더 밝혔다. 신원식 의원의 고향이 통영이라는 점. 세 국회의원의 고향을 알고나니 참 공교롭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인이 태어난 고향을 사랑하고 지역구민들을 위한 사업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정치의 요체는 국민 사이에 일어난 갈등을 봉합하고 국민을 통합하는 것이다. 시계를 다시 한번 임진왜란이 일어난 당시로 되돌아가 보자.
임진왜란 초기 거의 전멸된 경상도 수군에 비해 이순신을 필두로한 전라좌수영 수군은 전투준비에 만전을 다하고 있었지만 임란 초기 수륙 각 지역 전투에서 조선군이 일방적으로 패퇴하고 있던 상황이라 경상도 해역에 출동할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이때 녹도만호 정운은 "적세가 이미 서울까지 박두했으니 더 없이 통분함을 이길 수 없다. 만약 해전에서도 싸울 기회를 잃고 나면 뒷날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군관 송희립도 "영남은 우리땅이 아니란 말인가? 적을 치는데 이 지역 저 지역 차이가 없으니 먼저 적의 선봉을 꺾어 놓게 되면 본도 또한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고 주장해 전라좌수영 수군이 영남해역으로 진군해 옥포해전부터 부산포해전까지 연전연승할 수 있었다.
여수는 1593년부터 1601년까지 9년간 전라좌수영 겸 삼도수군통제영
지난 15일 (사)여수여해재단 회원 20여명과 함께 통영에 있는 제승당을 방문했다. 그런데 제승당 입구에 '최초 삼도수군통제영 제승당'이란 현판이 걸려있었다. 이순신에 관한 책을 여러권 읽고 공부한 필자와 일행은 "최초"라는 글귀를 읽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선조 25년인 1592년 4월 14일 왜군이 부산에 상륙한 지 20일만인 5월 3일 한양이 함락됐고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본영 및 관하 5관(순천, 낙안, 보성, 광양, 흥양) 5포(방답, 사도, 여도, 발포, 녹도)의 수령 장졸과 전선을 전라좌수영에 총집결시켜 전라좌수영 함대를 편성해 5월 4일 여수를 출발해 경상도로 향했다.
여수를 출발한 전라좌수군 함대 85척(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은 원균이 지휘하는 경상우수군 함대 6척(판옥선 4척, 협선 2척)과 함께 옥포해전에서 크게 승리했다. 전라좌수군 함대와 경상우수군 함대의 참전 비율은 15:1이다.
1592년 5월 4일부터 8월 24일까지 이순신은 크고 작은 접전 끝에 왜선 330여척을 격파했다. <이충무공전서> 2권에 기록된 임진초 4대 해전 사상자 수는 모두 216명으로 흥양현 출신이 131명에 달해 전체의 반이 넘었다. 임진왜란 당시 흥양현은 현재 고흥을 일컫는 지명으로 5포 중 4포가 고흥에 있었다.
조선수군이 세운 혁혁한 전과로 선조 26년(1593년) 8월에는 이순신장군이 전라 경상 충청수군을 총지휘하는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고 전라좌수영에 삼도수군통제영이 병설되어 선조 34년(1601년)까지 9년간 조선수군의 최고사령부 역할을 했다.
1대 이순신, 2대 원균, 3대 이순신, 4대 이시언 모두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의 직함을 제수받았으며 이순신이 한산도에 머문 3년 8개월은 전초기지에 불과했다. 종전 3년 후인 선조 34년(1601년) 3월에 이시언 통제사가 "전라좌수영이 해상방어상 너무 서쪽에 치우쳐있다"고 호소해 경상우수영(거제도 가배량)으로 옮겼다. 이후 선조 37년(1604년) 제6대 이경준 통제사 시절부터 경상우수영과 더불어 현 통영시로 옮겨 1895년(고종 32) 각 도의 병영과 수영이 없어질 때까지 292년간 지속됐다.
여수, 통영, 아산은 현재 이순신재단을 유치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출신 지역 정치인들은 표를 얻기 위해 지역이기주의에 편승해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올해는 임진 정유 두 왜란이 끝난 지 430년이 지난 해이다.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지역을 가리지 말고 출전을 주장했던 정운 장군과 송희립 장군이 이 소식을 들으면 한탄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호남이 없었더라면 나라도 없다"고 하며 <난중일기>에 여수를 본영이라고 10여번 쓴 이순신장군이 이 소식을 들으면 통탄하지 않을까? 선조의 명을 받고 비변사에서 논의한 후 여수에 최초의 사액 사당을 결정한 관리들은 뭐라고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