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압사 참사는 우리 사회에 또 한번의 큰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이 사건의 양상이나 원인, 대책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언론이 다루고 있고, 차차 진상규명이 이루어지면서 정리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 기사에서는 그보다 이 사건의 희생자와 생존자, 유가족을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기독교 성경에 <욥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비기독교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구절이 포함된 성서입니다. 이 책의 중심 인물인 '욥'은 신도 인정할 정도로 당대에 정의롭고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지역에서 유명한 부자였는데, 정당한 방법으로 자산을 축적했고, 자신이 번 돈을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기꺼이 사용했기 때문에 사람들도 그를 존경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주 최부자' 정도 되는 사람이죠.
그런데 어느날 그와 가족은 각종 재난의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다른 부족들의 공격을 받아서 자신의 재산인 가축들을 빼앗겼고, 종들이 죽었습니다. 난데없이 하늘에서 불벼락이 떨어져서 남은 가축과 종들도 몰살당했습니다. 그 와중에 태풍이 자녀들이 파티를 하던 집을 덮쳐서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욥 자신은 급성중증 피부병을 앓게 되어 온 몸을 그릇조각으로 긁어야 견딜 수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그런 그에게 신을 욕하고 죽으라고 악담을 퍼부었습니다. 얼마 뒤 친구 세 명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욥의 처지를 보고 7일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욥은 마침내 자신의 삶을 저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친구들이 그때 입을 열기 시작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네가 겪는 재난과 그로 인한 고난은 네 죄 때문이다. 너는 의인이라고 하지만, 잘 생각해봐라.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의 결론을 말씀드리면, 욥기의 메시지는 '이유 없는 고난도 있다. 재난의 이유는 누구도 알 수 없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사람들은 특정한 사건이 벌어지면, 그 이유를 찾는 합리적 사고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 이유는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모든 사건은 매우 복합적인 요인들에 의해서 발생하고 연쇄적으로 작용하는 복잡계의 과정과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 기사의 논점은 아닙니다.
재난을 당한 희생자인 욥에게 그 아내와 친구, 그리고 똑똑한 타인이 보인 반응을 종합하면, '희생자 비난하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인서비스 영역에서 잘 알려진 개념입니다. 범죄나 재난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 즉 희생자를 주변 사람이나 사회가 오히려 비난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2차 피해'를 유발하기 때문에 모두가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이미 죽은 청년들, 즉 망자에 대한 예의는 물론이고, 생존자들에게도 이러한 반응은 매우 부적절한 것입니다. 이런 사건을 경험했을 때 생존자들은 스스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왜 그때 거기에 갔을까? 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니면 다른 시간, 다른 경로로 갔더라면 괜찮았을텐데...", "그때 나는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위험하다고 생각했으면 진작 빠져나왔어야 했는데...", "그 상황에서 나는 왜 혼자 살자고 빠져나왔을까? 죽더라도 친구의 손을 잡고 있었어야 했는데..." 그러니까 후회와 자책감, 동행한 지인들에 대한 죄책감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특히 같이 갔던 친구들 무리에서 혼자 살아남았거나 구하지 못하고 남은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평생 죄책감에서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현대 기독교에서 이럴 때 경계해야 한다고 하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야'라는 말입니다. 기독교인들은 흔히 '고난이나 역경을 통한 성장'을 거론합니다. 최악의 경우는 타인들의 죽음을 두고 '그들은 그들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종종 기독교인들이 재난과 범죄의 희생자들을 두고 그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신학적으로도 올바른 생각은 아닙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재난을 당한 뒤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고 더 큰 상처를 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분들이 했던 분노의 표현들은 너무 극단적이어서 차마 여기에 말로 옮길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비기독교인들도 희생자들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들이 그때 거기에 갔다는 것만으로도 그런 일을 당할만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들이 잘못 했으니까 그런 일을 당해도 마땅하다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죽은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조롱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누구도 그때 거기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세월호에 탑승했던 고등학생과 교사 누구도 그 배에 그런 일이 생길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태원 골목길에 있던 그 누구도 작년과 다른 비극적인 일이 벌어질 거라고 예상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세월호와 이태원 골목길과 다른 재난과 범죄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후회하고 자책하고 죄책감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 느끼는 이런 감정들만으로도 그들에 대한 비난은 이미 차고 넘칩니다. 다른 사람들까지 나서서 감정의 범람을 부추길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일의 원인은 그들 자신에게 있기보다 외부 요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언론을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 이전보다 훨씬 많은 인파가 몰려들 것임을 예상할 수 있었음에도 경찰과 행정 당국은 미리 충분히 대비하지 못했으며, 해당 시간에도 적절한 행정적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국가는 시민의 안전을 위해 존재하는 체계입니다. 여하간에 희생자와 생존자들은 이 사건에서 자신의 통제범위를 넘어선 상황에 대해서는 자책감이나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재난과 범죄를 당한 사람들은 남은 인생에서 해당 사건을 자꾸 떠올리게 되는, 소위 '플래시백(Flash back)' 현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태원의 골목길에서 살아남은 분들도 당분간, 그리고 해마다 핼러윈 시즌이 되면 이 사건의 기억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태원 참사의 생존자들을 위해 국가트라우마센터가 즉각 개입을 결정하고 위기개입 팀을 투입한 것은 잘한 일입니다.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구축된 이 센터는 그동안 전문가들에 의해 개입체계를 잘 구축해 왔습니다. 가능한 한 생존자와 유가족, 관련자들이 모두 이 센터의 지원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플래시백 현상은 해당 재난을 경험한 사람들이 모여서 각자의 생각과 감정을 충분히 나누고 애도하고 공감하고 격려할 때 서서히 해소되어 가며, 그 과정을 통해 당사자들도 차차 스스로 견뎌내는 힘을 갖게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부정적 감정을 숨기지 말고, 마음속에 꼭꼭 담아두지 말고, 편안하고 믿을만한 사람, 너그럽게 들어줄 수 있는 사람들과 그 경험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태원 참사를 포함한 사회적 참사와 비극적 사건들의 희생자들을 지인으로 둔 우리와 일반 사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첫째, 섣부른 위로보다는 말없이 손을 잡아주고 옆자리를 지키면서 기댈 어깨를 준비하고, 그가 울 때 함께 울어주면 됩니다. '네 잘못이 아냐'라고 말해줘야 합니다. '잊어버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거야. 나중에 좋은 일이 생길 거야. 더 큰 축복이 기다리고 있나 봐'라는 말은 위로가 아닙니다. 공허하고 무책임한 말입니다.
둘째, 그에게 필요한 지원에 대해 미리 알아두었다가 그가 그 지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될 때 바로 연결해주고 도와줘야 합니다. 국가트라우마센터의 위기대응팀은 언제든 개입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희생자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개입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충분히 슬퍼하고 애도하고 진정된 뒤에야 우리는 합리적 대처를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사회는 우선 충분한 기간을 거쳐 함께 희생자들을 애도해야 하며, 철저한 조사를 통해 사건의 양상과 원인을 규명하여 진실을 밝혀야 하고, 책임자들은 그에 맞는 사과를 하고 잘못한 것이 있으면 그에 마땅한 처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복구와 보상은 마지막 단계입니다. 세월호 참사 때 보수언론은 유가족들이 받는 보상에 대해 잡음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자연재난이든 사회재난이든 범죄든 그로 인한 손실에 대한 보상은 충분한 적이 한 번도 없고, 충분할 수도 없습니다. 생때같은 자식을 허망하게 잃은 부모의 고통을 누가 감히 헤아릴 수 있으며, 그 상실을 어떻게 보상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긴 자녀를 얼마나 줘야 잊을 수 있을까요?
생존자들과 유가족들이 원하는 것은 철저한 원인 규명과 책임자의 진심이 담긴 사과이며, 유가족들에게는 충분한 애도가 필요합니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남겨 주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과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은 그 사건으로 인한 죽음의 목격과 국가의 부재보다 그 이후에 벌어진 가해자와 방조자들의 비인간적, 비인격적 태도와 행동으로 인해 더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참사 자체는 막을 수 없었지만, 그때와 같은 상처를 다시 경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무책임한 언론의 보도나 정치인과 행정가들의 막말, 미성숙한 일부 시민들의 반응은 여전히 경험하게 되겠지만, 깨어있는 시민들이라도 분연히 일어나서 희생자와 유가족들을 보호하고 돌보고 위로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