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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아팠다. 왜 아픈지도 모르겠는데, 아마 한국 다녀와서 긴장이 풀려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그냥 컨디션이 뚝 떨어져서 하루 종일 누워 지냈다. 내가 바쁘면 식사를 다 챙겨주는 남편이지만, 남편이 아프니 내가 챙겨야 할 상황이었다. 문제는, 한국인과 캐나다인은 아플 때 음식 먹는 것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이다.

아플 때 죽을 먹는 한국에 비해, 서양에서는 오히려 토스트를 먹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나는 생각만 해도 입안이 깔깔할 지경이었다. 이제는 그러려니 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점심은 전날 먹고 남은 소고기 수프로 넘겼는데, 저녁시간이 다가오자 뭐를 줘야 할지 모르겠다 싶었다. 금방 일어날 줄 알았던 남편이 계속 그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생각해보니, 한국 여행 가기 전에 맷돌호박을 갈무리한 것이 생각이 났다. 맞아, 그걸로 호박죽, 아니 호박 수프를 끓여주면 좋겠다 싶어서 냉동실 문을 열었다. 
 
 냉동해둔 조선호박 조각들
냉동해둔 조선호박 조각들 ⓒ 김정아
 
그러나  내가 얼려 둔 호박은 완숙되지 않은 조선호박이었다. 확인해보니 맷돌호박은 말려서 호박고지를 만들었기 때문에 수프를 끓일 수 없었다. 조선호박은 된장찌개에 넣거나 새우젓 넣고 볶아 먹기 좋은 상태의 것들이었는데, 여행 전에 당장 다 먹을 수가 없으니 그대로 성큼성큼 썰어서 하루만 살짝 말렸다가 냉동했었다.

그냥 냉동하면, 수분이 너무 많아서 쉰내가 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보통은 살짝 데치거나 소금에 살짝 절여서 얼리기도 하지만, 그때 너무 바빠서 그럴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채반에 하루 말렸다가 얼렸다.
 
 호박을 냉동하기 전에 하루 정도 애벌 말리기를 하면 좋다
호박을 냉동하기 전에 하루 정도 애벌 말리기를 하면 좋다 ⓒ 김정아
 
생각을 더듬어보니, 그때 그 호박이 너무 맛있어서, 말리면서도 왔다 갔다 생호박을 집어 먹었던 것이 기억났다. 어쩐지 살짝 달큼하면서 상큼한 맛의 그 호박으로도 호박 수프를 끓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나는 그냥 실천에 옮겨보기로 했다.
 
 호박죽과 달리 호박수프는 마늘과 양파를 먼저 기름에 볶아준다
호박죽과 달리 호박수프는 마늘과 양파를 먼저 기름에 볶아준다 ⓒ 김정아
 
호박죽과 다르게 호박 수프는, 오일에 볶다가 끓인다. 팬에 기름을 두르고 중약불로 마늘과 양파를 볶았다. 굳이 다질 필요 없이 채 썰면 된다. 이때, 태우지 않는 것이 포인트다. 어느 정도 볶아졌다 싶을 때, 호박을 넣으면 좋은데, 얼렸던 호박이니 물기가 더 많을 것 같아서 쌀가루를 한 숟가락 넣어서 같이 볶아 줬다. 그리고 다시 호박을 그대로 쏟아붓고 볶아줬다.
 
 호박수프를 끓이기 전에 먼저 한 번 볶아서 맛을 깊게 해준다
호박수프를 끓이기 전에 먼저 한 번 볶아서 맛을 깊게 해준다 ⓒ 김정아
 
역시 예상대로 물이 많이 나와서 잘 볶이지 않았다. 그 점이 좀 아쉬웠다. 먼저 볶아지는 것이 더 맛있는데 이미 국물이 흥건했다. 결국 포기하고 육수를 부어 끓였다. 그리고 호박이 충분히 부드러워졌을 때, 믹서기에 넣고 곱게 갈아줬다. 핸드블랜더를 이용하면 좀더 식감이 있는 수프가 되겠지만, 이건 환자용 수프이니 최대한 매끄럽게 갈고 싶었다. 마무리로 생크림을 좀 섞어줬다.

맛을 보니, 약간 맛이 약했다. 호박맛 그 자체였다. 계피를 좀 넣을까, 카레가루를 좀 넣을까 망설이다가 그냥 소금 간을 좀 더 해줬다. 간이 좀 더 되면 고소한 맛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다음번에는 캐슈 같은 견과류를 좀 섞어서 끓여주는 게 좋겠다 싶었다. 아쉬운 대로 레몬즙을 한 큰 술 넣어주니 좀 더 맛이 선명해졌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기에 부랴부랴 상을 준비했다. 수프용 그릇에는 뜨거운 물을 부었다 따라내서 온도를 따뜻하게 해 주었고, 토스트도 한쪽 구워서 버터를 발랐다. 수프에 허브나 호박씨를 좀 얹어서 장식하면 좋겠지만, 이미 시간이 오래 걸려서 그대로 배달했다.
 
 간단히 완성한 호박수프
간단히 완성한 호박수프 ⓒ 김정아
 
남편의 평가는, '호박의 풍미가 듬뿍 살아있는 맛'이라고 했다. 그렇다. 호박 수프가 어디 가겠는가. 녹색의 싱그러움과 호박의 건강한 맛이 함께 들어있는, 아주 부드러운 호박 수프였다. 단 맛을 즐기지 않는 우리 식구에게 딱 좋았다.

디저트 같은 달달한 수프라면 단호박을 이용하는 것이 좋겠지만, 이렇게 달지 않은 호박을 이용해서 건강하게 끓이면 환자식으로도 좋고, 간식으로도 나무랄데 없을 것이다. 조선호박이 없는 경우, 애호박이나 주키니 호박으로 해도 좋다.

감사하게도 남편은 이것을 먹고 기력을 회복했다. 냉동실에 한 봉지가 더 남아있는데, 그것은 다음 달에 딸 오거든 끓여줘야겠다. 

조선호박 수프 만들기

올리브 오일 2큰술, 버터 1큰술, 마늘 1쪽, 양파 반개, 쌀가루 1큰술, 호박 850g, 소금 1 작은술, 캐슈너트 한 움큼 (옵션), 육수 반 컵(120ml), 레몬즙 1큰술, 생크림 1/4컵, 꿀 1 큰술 (단 맛이 필요한 분들만)

1. 큰 냄비에 불을 중약불로 한 후, 버터와 올리브 오일을 넣어서 녹인다.
2. 마늘과 양파를 썰어서 넣고 5분 정도 볶아준다.
3. 쌀가루를 1큰술 넣고 같이 섞듯이 볶아준다.
4. 호박을 넣어서 같이 볶는다. 10분 정도(캐슈너트를 넣으려면 이때 넣는다).
5. 소금과 육수를 넣고 익도록 10분 정도 끓여준다.
6. 믹서기에 쏟아 넣어 곱게 갈아주고, 다시 냄비에 부어준다.
7. 간을 보고, 필요하면 소금 간을 추가한다.
8. 생크림 또는 우유를 넣고 1분만 더 끓인 후 불에서 내려 서빙한다. 호박씨 등으로 장식하면 더 예쁘다.

덧붙이는 글 | 기자의 브런치에도 같은 내용이 실립니다 (https://brunch.co.kr/@lachouette/)


#호박수프#조선호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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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 거주하며, 많이 사랑하고, 때론 많이 무모한 황혼 청춘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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