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원주시, 충청북도 충주시, 경기도 여주시의 경계가 모이는 남동쪽에 있는 원주시 부론면. 이곳에 고려시대에 전성기였던 두 폐사지(절터)가 있다. 하나는 부론면 행정복지센터에서 동쪽 편에 있는 법천사지. 다른 하나는 황학산 동편 정산리에 있는 거돈사지다.
법천사지는 고려시대 고승인 지광국사의 사리탑과 그의 공적을 기록한 탑비로도 유명한 곳이다. 조선 시대에도 태재 유방선이 이곳에서 서거정, 한명회, 권람, 강효문을 가르쳤는데, 임진왜란으로 불타기 전까지는 상당히 명성이 드높았던 사찰이었다. 거돈사지에도 고려 현종 시절 왕사였던 법안종 승려인 원공국사비가 있는데, 비문은 해동공자 최충이 지었다.
한때는 드넓은 사찰이었다가 오늘날 탑과 탑비만 남은 법천사지와 거돈사지를 가보자.
법천사지
법천사지는 부론면 동편에 있다. 수도권과 호남지역에서 출발하는 경우 영동고속도로 여주 나들목에서 내려서 37번 국도를 따라 점동면까지 내려온 후 좌회전하자. 그 후 단암 삼거리에서 다시 좌측으로 꺾어 남한강대교를 건넌 후 부론면을 지나 법천리로 향하는 길로 가면 된다. 영남지역에서 오는 경우는 평택제천고속도로 동충주 나들목에서 내려 38번 국도를 따라가 양성면 쪽으로 빠진 후 49번 지방도를 이용하자.
법천사지에 도착하니 별원권역 II-가 구역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뒤로는 숫자 호수가 붙은 파란 팻말이 수없이 붙어있는데, 복원작업이 한창이다. 복원작업을 진행하는 곳 뒤에는 아름다운 조명장치로 가득한 곳이 있어 가까이 가보니, 한때 불상이 있던 금당 자리다. 그 뒤로 경전을 강의하고 큰 스님이 설법을 했던 강당터가 있다.
옛 강당 북서 편으로는 석축과 복원된 유구들로 가득한데, 법천사가 상당한 규모의 건물이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해야 할까. 조선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태재 유방선이 법천사에서 서거정, 한명회, 권람과 같은 당시 유명인사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숭유억불 기조에도 유학자들이 법천사를 방문한 것을 보면 당시에도 명성이 여전했음을 알 수 있다. 불교를 국시로 걸었던 고려시대에는 말할 것도 없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은 조선시대보다는 주로 고려 기와류, 자기류, 동전 등이 발굴되었다고 하니까.
유구들이 가득한 곳을 등지면 나무 두 그루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듯 고독한 모습으로 서 있다. 특히 오른편에 선 나무의 나무줄기가 상당히 두꺼운데, 오랫동안 빈 터가 된 절을 지켜온 느낌이 들었다. 임진왜란 때 불타 바스러진 법천사를 애도하며 오랫동안 지켜온 상주와 같다고 해야 할까?
다시 금당터로 돌아왔는데, 마침 조명 설치를 감독하고 있는 분이 있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알고 보니 내일과 모레(취재일은 2022년 10월 15일이다) 실시하는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환수 기념행사'가 있다고.
국보 제101호 지광국사탑. 고려 문종 때 국사이자 법상종의 고승이었던 지광국사 해린의 공적을 기린 승탑이다. 탑이 법천사지에 세워진 이유는 이곳이 지광국사가 출가하고 말년에 입적했던 장소이기 때문이다.
탑은 여러모로 시련을 겪었는데, 먼저 임진왜란 때 절이 불탔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다가 1912년 일본 오사카 후지와라 남작 가문의 묘지로 반출되다가, 1915년 조선총독부의 명으로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근처로 옮겨왔다. 그러다가 6.25 전쟁 때에는 유탄 폭격을 받아 1만 2000개가 넘는 조각으로 방치되었다가 1957년 복원했는데, 당시 복원 기술이 부족하여 모르타르와 현대 자재를 썼다.
복원된 탑은 경복궁에 남았는데, 복원재료로 썼던 모르타르가 탈락하고 탑의 훼손이 더욱더 심각해져. 결국 2015년 대전에 있는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옮겨져 수년간 보존처리 작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드디어 보존처리가 거의 끝나 110여 년의 세월을 거쳐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이 결정되었다. 하지만 반환절차와 세부사항에 대한 논의가 더 필요해서 완전히 이전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한다.
지광국사탑이 있던 곳은 금당 오른편 야트막한 언덕에 있다. 탑이 있던 곳 바로 옆에는 큰 비석이 하나 있는데, 지광국사 해린의 삶과 업적을 기록한 국보 제59호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다. 받침돌 아래 거북이 상당히 특이한데, 얼굴은 용의 모양을 하고 있고 등껍질에 사각형을 새겨 안에 왕(王) 자를 새겼다. 또한 탑비 좌우 옆면에는 구름과 어우러진 용 두 마리가 상당히 정교하게 새겨졌는데, 고려인들이 이상향으로 삼았던 미륵 용화세계를 나타냈다.
법천사지 금당에서 남쪽을 보면 현대식 건물이 하나 보이는데, 이번 11월 말에 개관할 법천사지유적전시관이다. 전시관 옆에는 옛 법천사 입구임을 보여주는 당간지주를 볼 수 있는데, 탑비와 함께 절터를 지키고 있다. 당간지주는 금당터에서 거리가 떨어져 있는데, 주변에서 법천사와 관련된 유물이 발굴된다고 하니 고려시대에 얼마나 거대한 규모였는지를 알 수 있다.
거돈사지
법천사지에서 다시 나와 531번 지방도에서 좌회전을 하면 부론면 행정복지센터를 볼 수 있다. 이후 충주방향으로 내려간 후 정산1교차로에서 다시 좌회전을 하면 완만한 언덕길을 오르게 되는데, 길을 가다 보면 왼편에 삼층석탑과 탑비를 볼 수가 있다. 남한강 동편 원주의 또 다른 폐사지인 거돈사지다.
먼저 거돈사지의 동편에 있는 탑비를 보았다. 역시 용의 머리를 하고 있는 거북이 커다란 비석을 지고 있다. 그리고 팔각의 귀갑문은 지광국사탑비와 달리 육각형 화문과 '만(卍)'자가 규칙적으로 새겨져 있다. 비신(碑身)에는 한자들이 새겨져 있고, 그 위 옥개석인 이수는 구름과 용이 얽혀있는 모양이다. 보물 제78호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다.
원공국사 지종은 광종 때 일시적으로 불교계를 주도했던 법안종의 고승이었다. 탑비가 세워진 이유는 원공국사도 지광국사와 마찬가지로 고려 왕사였던 데다가 말년을 거돈사지에 보냈기 때문이다. 현종 16년(1025)에 세워졌는데, 당시 해동공자로 불렸던 최충이 비문을 짓고 김거웅이 해서체로 글씨를 썼다. 참고로 원공국사탑도 원래 이 자리에 있었는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탑비에서 서편으로 가니 삼층석탑만 홀로 남은 절터가 보인다. 경주 감은사지의 두 탑처럼 거돈사지의 화려했던 시절을 추억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보물 제750호 원주 거돈사지 삼층석탑. 탑의 형식을 보니 9세기에 통일신라 양식이다. 석가탑처럼 몸돌에 아무런 장식이 없어 상당히 수수한 느낌이 든다. 삼층석탑과 원공국사탑비를 보면 적어도 통일신라 때 창건되어서 고려시대에 절정을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
탑 뒤로는 석축과 유구들이 가득한 가운데, 유독 중앙에 있는 바윗돌이 눈에 띈다. 보통 탑 뒤로는 부처를 모셨던 금당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는데, 바윗돌은 금당 내 부처님을 모셨던 화강석 불대좌(佛臺座)다. 또한 전면 6줄, 측면 5줄의 초석이 아직 남아 있는데, 20여 칸 크기의 대법당이 있었다고 한다.
금당 뒤로 또 다른 석축이 하나 보이는데, 정돈된 금당의 것과 달리 자연석으로 이뤄져 있어 강당 자리임을 알 수 있다. 강당 뒤로 보이는 석축들과 유구들은 스님들의 생활공간인 승방터와 우물 터다. 유구들을 보면 거돈사도 남한강 동편에서 잘 나갔던 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기록으로 전해지지 않는다.
원주시 부론면 남한강 동편에 있었던 법천사와 거돈사. 고려 초기 국사와 왕사가 마지막 여생을 보낸 곳으로도 유명한데, 법상종과 법안종을 대표하는 두 승려의 탑비가 오늘날까지 남은 것을 보면 당대 고려왕실과 불교계에서 존경받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복원된 절터의 유구들은 화려했던 옛 시절을 어느 정도 추측하게 한다.
안타깝게도 법천사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불탔고, 거돈사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자연의 품으로 돌아갔다. 사찰 건물이 즐비했던 곳은 승탑과 탑비 그리고 가운데에 홀로 서 있는 삼층석탑만이 남아 옛 시절을 추억하고 있다. 특히 해질녘이 되면 남겨진 이들의 외로움이 더욱 돋보이는데, 석양이 질 때 이곳을 찾아서 절터에 홀로 남은 이들을 위로해주는 것은 어떨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브런치에 동시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