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한승헌 변호사.
한승헌 변호사. ⓒ 연합뉴스
 
한승헌은 서울구치소 2사(舍)상 5방에서 감옥살이를 하였다.

원래 약골인데다 그동안 정신적 육체적 시달림으로 소화기능 장애와 탈진으로 병사로 옮겨졌다. 변호인단이 보석을 청구했으나 기각되었다. 

수감생활 9개월 만인 12월 19일 석방되었으나 1976년 11월 23일 대법원에서 유죄로 확정됨에 따라 변호사 자격이 박탈되었다. 이제 실업자 신세였다. 

독립운동가에서 비롯되어 민주화운동가들에게 이어진 고통의 으뜸은 가족의 생계와 자제의 교육문제였다. 지금도 보수(수구) 쪽 인사들은 민주화운동 인사들을 '운동권' 운운하며 비하하지만, 대한민국이 민주국가가 되고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데는 민주화운동에 신명을 바친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막상 당사자들은 (소수를 제외하고) 힘든 삶을 영위하였다. 일자리가 주어지지 않았고 자본이 없어 창업도 어려웠다.

독기서린 정권 아래서 누가 나에게 생업의 문을 열어줄 리 없었다. 생각 끝에 어느 고시학원을 찾아갔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자 강좌 내용을 안내하는 인쇄물들이 쌓여 있기에 그 중 한 장을 집어 들여다보았다. 내가 무슨 과목을 가르칠 수 있을까. 나를 써주기나 할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시선을 옮기고 있는데 그곳의 안내 직원인 듯한 젊은 여성이 묻는다. 

"사시에요? 행시예요? 무슨 시험을 준비하시는데요?"

나를 수험생으로 보고 묻는 그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반가움을 느꼈다. 아직은 내가 수험생으로 보일 만큼 젊다는 말이 아닌가. 낡아서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을 내려오는 발걸음이 몰지각하게도 가벼웠던 기억이 난다. (주석 1)

백수로 여러 달이 지난 1976년 4월 한국사법행정학회에서 발간하는 월간 <사법행정>과 <법정>의 주간을 맡아달라는 제의가 왔다. 그나마 '권력의 독기'에서 벗어나 있는 학회여서 가능했을 것이다. 어렵게 마련된 '직장'에 열과 성을 다했다. 

감옥에 있을 때 독학으로 저작권법 분야를 공부한 것이 여러 면에서 도움을 주었다. 이어령 교수의 권고가 "머지않아 지식 중심의 시대가 오면, 저작권 문제가 크게 부각이 될 테고 그 분야의 공부를 해두면 나라에도 크게 이바지하게 될 것"이라는 견해에 공감하여 연구했던 것이다. 감옥에서도 사회과학 분야는 차입이 불가했으나 저작권 관련 서적은 용인되어서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그는 늘 마음속에 두고 온 인간의 정신적 창조를 존중하는 권리, 즉 저작권에 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개시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976년 12월 한국저작권연구소를 개설하고 소장이 되었다. 그것은 좌절된 변호사가 다시 명함으로 쓰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 열심히 이 방면의 연구에 힘을 기울여 많은 연구논문들을 발표하였다. 어떻게 보면 하늘이 그에게 연구할 기회를 주기 위해 '별 볼일 없는' 전직 변호사를 만들어 준 것 같다. (주석 2)


주석
1> <자서전>, 202쪽.
2> 최종고, 앞의 책, 79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양심 한승헌 변호사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한승헌#시대의양심_한승헌평전#한승헌변호사평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