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여 점이 되는 이번 전시 작품은 네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나뭇가지가 캔버스에 부착되어 입체와 평면이 함께하는 작업, 흰색, 노란색, 보라색의 배경이 강렬한 획과 터치, 번짐효과로 이뤄진 자작나무 풍경들 작업, 그리고 눈이나 안개에 휩싸여 형상을 찾기 어려울 정도의 추상화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작업, 그리고 자작나무가 없는 완전한 추상작업이 있다.
이 풍경 작업들은 전시명인 '자작나무 그늘-내 마음의 풍경'처럼 실제 풍경을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니다. 마음의 풍경이다. 관념산수인 것이다. 임현오 작가의 작품을 처음 본 것은 10년도 더 지났다.
100호 크기의 화면에 길게 내민 혓바닥을 강렬한 색채로 사실적으로 그린 것이었는데, 그렇다고 극사실 묘사는 아니고 힘 있는 붓질이 가미되었지만, 극사실적으로 보이는 그런 작업이었다.
이런 부류의 작업을 지속해나가면 국제적으로 명망을 떨칠 수 있는 작가가 될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몇 해가 지나고 나서 이 자작나무 그림을 들고 나온 후 지금껏 자작나무 그림을 그리고 있다.
현대미술 작가로 독보적인 명성을 얻으려면 자기만의 이미지 창출이 있어야 한다. 진입장벽이 높은 자기만의 색깔이 있어야 한다. 나무, 악기 등 입체물을 직접 캔버스에 부착시키는 것은 80~90년대 공모전에 횡행하던 것이다. 자작나무 풍경은 여러 사람이 그린다. 자신만의 독특함이 관람객에게 감동을 더 줄 수 있다. 익숙한 이미지는 그 정서적 파장을 주기가 힘든 것이다.
그런데 이번의 눈이나 안개에 휩싸인 풍경들은 신선하게 보였다. 그만의 이미지,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형상이 사라진 모호한 마음의 풍경은 고스란히 관자의 마음에도 내려앉는다. 형상은 상상을 제약한다. 형상이 사라진 모호함은 관자가 끼어들 틈이 많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여섯 작품 정도의 완전한 추상 작업은 더 눈길이 끌렸다. 겨울의 어느 언덕을 사실 묘사한 듯한 느낌을 준다. 이 갈색조들의 추상 작업은 힘찬 붓질과 여러 효과의 다양한 정서적 감응을 불러일으키며 원숙한 경지에 이른 대가의 작품 같은 풍모도 느끼게 한다.
일견 70~80년대 홍대유파의 작업 같은 느낌을 주긴 했지만, 안개에 휩싸인 자작나무 풍경과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작업 과정에서 스스로 자연스레 나오게 됐음을 느낀다. 그래서 자작나무 풍경과 함께 걸어놓아도 자연스레 어울린다.
이제 그의 작업이 형상을 버리고 완전 추상으로 갈 것이냐 아니면 지금처럼 구상과 추상을 혼재하며 갈 것이냐는 갈림길에 있다. 그의 작업에 대한 열정이 큰 작가로 순간이동 하는 길을 조만간 활짝 열어 젖힐 것이다.
11월 13일까지 안동문화예술의전당 34갤러리에 가면 안개에 쌓인 하아얀 자작나무 숲을 거닐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