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유성애 중독 사회다. 그 중심에서 연애 혹은 섹스하지 않을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에이엄브렐라' 성향의 이들이다. 에이엄브렐라는 어떠한 성별에도 정신적 사랑을 느끼지 않거나 육체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성 지향성의 총체를 일컫는다. 우리에겐 무성애란 이름으로 더 익숙하지만, 이보다 포괄적인 상위 개념으로 사용한다. 생소한 용어만큼 소외된 집단. 한국 사회에선 있어도 없는 존재였던 에이엄브렐라 성향자를 만나 그들의 삶을 들여다봤다.[기자말] |
에이로맨틱 정체화 통한 '아하 경험'... 비로소 나는 완전해졌다
내가 처음 스스로를 '에이로맨틱'이라고 자각하게 된 건 2019년 '악플의 밤'에 출연한 설리가 "짝사랑 하는 걸 좋아해요"라고 한 말을 접했을 때부터였다. 설리의 발언이 트위터에서 화제되면서 '설리가 에이로맨틱일 수도 있겠다'라는 트윗이 퍼졌다. 그 트윗을 본 뒤 에이로맨틱의 개념을 찾아보게 된 게 그 시작이었다.
처음엔 '이런 존재가 있구나' 하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한참 뒤 머리를 탁 치며 '이거 나잖아?' 하는, 이른바 '아하 경험'을 했다. 그렇게 나를 에이로맨틱이라고 정체화 하는 순간, 그간의 경험과 느꼈던 감정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며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 들었다.
고백을 받았던 순간에 왜 하나도 기쁘지 않고 거북스럽기만 했는지, 연애적 호감을 보이는 사람들을 왜 그렇게 피해 다녔는지, 누군가와 성애적으로 엮이는 순간이 왜 그렇게 불쾌했는지 등... 그 붕 떠있던 의문의 조각들이 모두 빈틈없이 맞춰졌다. 나는 줄곧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해왔는데, 난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그저 에이로맨틱이었던 것이다.
연애, 섹스하는 무성애자? 에이엄브렐라 스펙트럼
그동안 내가 스스로 에이로맨틱, 즉 무연정자라고 정체화 하지 못했던 이유는 에이로맨틱의 스펙트럼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무성애자 혹은 무연정자로 일컬어지는 에이엄브렐라의 이미지는 마치 "사랑? 그게 뭐지? 관절에 기름칠이나 해줘 형씨"라고 말하는 양철나무꾼 같다. 에이엄브렐라의 스펙트럼을 모르는 이들에게 에이엄브렐라는 사랑의 감정을 품지 않고 고립된 채 인생을 버석하게 살아가는 이미지에 가까울 것이다.
나 역시도 그런 편견을 가진 사람이었다. 무성애자(혹은 무연정자)는 모두 '셜록 홈즈'처럼 냉혈하고 인정이 없는 사람일 것이라고 무의식 중에 생각했다. 그렇기에 친구들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끼기도 하며 로맨스 콘텐츠를 소비하고 즐거워하기도 하는 나는 내가 연애에 관심이 없는 이유가 그저 어리고 또 수줍음이 많기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치부해왔다.
이쯤에서 에이엄브렐라가 대체 무엇인지 혼란스러울 이들을 위해 간단히 그 스펙트럼을 설명하고 가겠다. 현재 에이엄브렐라 스펙트럼은 학술적 연구를 통해 정리됐 다기보다는 미국의 에이엄브렐라 커뮤니티의 당사자들이 경험을 통해 스펙트럼을 정리한 정도다.
이중 나는 리쓰로맨틱(연애 감정을 경험하지만 감정을 주고받는 걸 원치 않음)과 오토코리스로맨틱(연애적인 생각을 즐기지만 당사자가 되고 싶어하진 않음)에 해당한다.
불쑥 호감이 느껴지는 상대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 상대와 연애를 하고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또한 콘텐츠로서 소비하는 유성애로부터 즐거움을 얻기도 하지만 그건 오직 남의 얘기이기 때문에 그렇다. 내게 '유성애'란 SF 소설인 셈이다. 내게 일어나지 않을 타인의 일로 바라보며 철저히 판타지로 소비한다.
그렇다고 사랑을 등한시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사랑이 이 인류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며 사랑 없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고 믿는다. 사랑의 다양한 형태 중 일명 '에로스적 사랑'에만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을 뿐이다. 나는 타인을 아끼고 걱정하는 마음, 신뢰, 연대 등의 모습을 띈 사랑이 가진 가치를 더 믿는,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다.
비정상의 범주로 타자화되는 에이엄브렐라
에이로맨틱으로 정체화를 하고 정체성을 감출 생각은 하지 않았다. 친하지 않고 젠더 섹슈얼리티에 큰 관심이 없어 보이는 이들에게는 설명이 번거로워 연애에 별로 관심이 없다고 일축하긴 했으나 친한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는 꼭 내가 에이로맨틱이라고 밝혔다.
그때의 반응은 대체로 '그렇구나' 정도였다. 이 반응은 여타의 성소수자 커밍아웃과 달리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까 불안하게 만드는 태도는 아니었다. 또한 감사하게도 내게 '네가 아직 연애를 안해봐서 그래, 아직 좋아하는 사람을 못만나봐서 그래' 같은 반응을 보이며 내 정체성을 부정하고 상처를 준 친구는 없었다.
하지만 그만큼 적극적으로 그 정체성을 궁금해하는 사람 역시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에이로맨틱이라는 정체성을 밝혀도 상대가 느끼기에 큰 변화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에이엄브렐라의 상태는 한 인간이 정념 상태일 때와 유사하기 때문에 이제까지의 생각이나 앞으로의 방향성이 커밍아웃 이전과 달라지지 않는다.
이에 상대는 오히려 누군가가 애인이 생겼다고 고백해왔을 때보다 더 대수롭지 않게 느낄 수도 있다. 이처럼 나는 에이로맨틱이라는 이유로 눈에 가시화되는 물리적인 차별을 겪은 적은 없다. 다만 내가 에이로맨틱으로서 차별과 소외감을 느끼는 순간은 유성애라는 거대한 정상성을 맞닥뜨리고 그 앞에서 자연스레 비정상의 범주로 타자화 되는 순간이었다.
유성애 중독 사회, 나는 외로워진다
청년들에게 연애를 권하는 사회는 철저히 에이엄브렐라를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든다. 동성애는 사회가 그 존재를 인지하고 억압하는 형태의 차별을 가한다면 무성애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정체성인 양 취급하는 게 현실이다. 이런 사회적 풍토는 차별과 소외가 적극적으로 이뤄지는 다른 성소수자 혐오와는 달리 특별하지 않은 말과 행동에도 에이엄브렐라가 스스로를 타자화 하게 만든다.
연애가 당연한 사회에서 친구들이 연애를 시작하면 때때로 나도 모르게 저게 정상적인 모습이고 '나는 뭔가를 놓치고 사는 건가' 하는 의구심이 들곤 한다. 여전히 연애하지 않는 사람을 어딘가 부족한 사람, 모자란 사람 취급하는 폐습은 한 번도 연애를 해보지 않은 나를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도록 만들기도 한다.
삼삼오오 모여 당연하다는 듯이 연애 이야기가 시작되면 얹을 말이 없는 나는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충동이 들 때도 있다. 사회는 청년들이 연애와 결혼을 너무 안 해서 문제라고들 하지만 나의 시각에서 이곳은 유성애 중독 사회다. 유성애와 연애가 인간의 기본값으로 정해진 사회는 에이엄브렐라를 보지 못한다.
비정상 아닌 '자신을 더 잘 아는 사람'
에이엄브렐라는 여전히 'LGBTQIA' 중 가장 비가시화 되는 퀴어다. 퀴어 커뮤니티에서는 물론 사회 전반적으로 그 정체성 자체를 모르는 이들이 아직은 너무나 많다. 그만큼 세상엔 자신이 에이엄브렐라인지 인지하지 못한 채 자신의 비정상성에 괴로워하는 사람 역시 많을 테다.
에이엄브렐라로 정체화 해도 여전히 나를 비정상으로 분류하는 사회에 타자가 됨을 느낄 수 있겠지만 나의 정체성과 사회적 풍토의 불합리함을 인지하고 있는 상태와 그렇지 않은 상태는 천지차이다.
나는 함께 에이엄브렐라 정체성의 경험을 나누고 우리가 비정상이 아닌, 그저 '자신을 더 잘 아는 사람'이라는 감정을 공유하며 나아가고 싶다. 이에 다양한 이들의 실질적 경험을 들으며 에이엄브렐라의 네러티브를 기록하고자 여러 명의 에이엄브렐라와 인터뷰를 진행했다(후속 기사에 다뤄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서울여자대학교 바롬 졸업 프로젝트 팀 <에이슈>의 기사입니다. 김나현(저널리즘 전공), 임하늘(일어일문학과), 장혜윤(저널리즘 전공), 정다슬(디지털영상전공)로 구성돼 있습니다. '에이엄브렐라 가시화'라는 큰 주제를 축으로 활동합니다. 기획기사와 캠페인 활동을 통해 퀴어 내에서 소외받는 에이엄브렐라의 존재를 알리고 이를 통해 유성애 중심 사회 속에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