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유신 투쟁에 앞장선 민주인사들에게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를 저격 암살한 사건은 일종의 복음이었다. 투옥이나 수배 중 또는 직장에서 쫓겨난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했을 터이다. 그리고 소망했던 민주화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였다.
정국은 역류하고 있었다.
독재권력의 음지에서 정치공작과 치부로 권력의 단맛을 즐겨온 일단의 정치군인들이 12.12사태로 군권을 장악하고 이어 5.17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도득했다. 이들은 광주를 콕 찍어 분란을 일으키고, 정권유지에 저해된다고 판단한 김대중을 여기에 엮었다.
시국사건을 변호하다가 찍혀서 감옥살이를 하고 풀려서 생업으로 출판업을 하며 민주화운동의 일선에서 싸우던 한승헌에게 전두환 5공정권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조작하면서 그를 끼워넣었다. 김대중의 측근 이외 재야 및 학생운동 핵심 인사들을 연루시켜 민주화운동 진영 전체의 와해를 기도한 것이다.
광주를 찍은 것은, 박정희정권 18년 동안 호남차별정책으로 고립화된 그곳에서 설사 저항이 일어나더라도 타지역으로 번지지 않을 것이고, 이참에 눈엣가시와 같았던 김대중을 배후 종자로 엮어 처리하는, 일석양조의 효과를 노리는 정교한 시나리오였다.
10.26사태 후 민주정부의 탄생을 기대해 본 것도 잠시였을 뿐, 난데없는 12.12, 5.17은 역사의 운행을 역전시키고 말았다. 당시 국제 앰네스티 한국위원회의 운영책임을 맡고 있던 나는 5월 17일 밤늦게 집으로 들이닥친 합수부 사람들에게 영문도 모르고 끌려갔다. 낯설 것도 없는 남산의 그 건물 지하 2층에서 사흘 모자라는 두 달 동안 하늘 한번 보지 못한 채 온갖 수모와 가혹행위를 당하면서 조사를 받았다.
그 결과, 세칭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조연급 피고인으로 선발되어 군법회의에 넘겨졌고 1심에서 4년 반, 2심에서 3년의 징역형이 떨어졌다. 서대문의 서울구치소에서 남한산성 밑의 육군교도소로, 그 다음엔 김천소년교도소로 이렇게 다양한 감방 편력을 하는 가운데 남다른 경험을 많이 쌓았다. 하필이면 나 혼자만을 소년교도소로 보낸 것은 나야말로 소년처럼 천진난만하다는 사실을 정부도 인정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자랑도 했다. (주석 1)
신군부는 5월 17일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동일 저녁늦게 '김대중일당'을 구속수감했다. 그리고 이들이 내란음모를 했다고 둘러씌웠다. 정작 내란을 일으킨 자들이, 새총 한 자루도 갖지 않는 민간인들을 '내란음모'로 치죄한 것도 비상식이지만, 5월 18일 발생한 광주민주항쟁을 이미 검거된 상태에서 배후조종했다는 혐의는 낯간지러운 억지였다.
내가 실려 간 서울구치소는 나에게는 '재수'였다. 재수 없이 또 걸려든 '재수'.
그런데 이번엔 전에 없던 '곱징역'이었다. 교도관들을 못 믿어서인지 헌병들까지 들어와서 이중의 감시ㆍ관리하는 것이었다. 입소하는 날, 나를 데리고 감방으로 가던 교도관이 "개O 같은 세상 만나서 고생 좀 하시게 되었습니다"라고 위로인지 연민인지 모를 말을 했는데, 그의 '개O 같은 세상'이라는 상말이 나에게 위로를 주었다. (주석 2)
박정희 시대의 투옥이 예비고사격이었다면 전두환 시대는 본고사에 해당되었다. 그때는 반공법 위반으로 엮였지만, 이번에는 내란음모로 꾸몄다. 그리고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을 '처리'하려는 의도에서 쓰인 시나리오여서, 비록 '조연급'이지만, 형량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재판 도중에 모든 피고인들에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추가시켰다.
한승헌은 9월 17일 육군계엄군법회의에서 4년형을 선고받고 서울구치소에서 남한산성 밑에 있는 육군교도소로 이감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찾아왔다. 밖으로 불려나갔더니, 안기부(종전의 중앙정보부가 그 무렵 국가안전기획부로 개명을 했다)에서 왔다는 두 요원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나더러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며 인사말을 했다. 그러면서 꺼내놓은 용건은, 각서 한 장만 쓰면 풀어주겠다는 것이었다. 무엇을 잘못했다고 안 해도 좋으니, 앞으로 나가서 법을 잘 지키며 살겠다고만 한 줄 쓰면 된다고 했다.
순간 여러 가지 생각과 계산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잠시 후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난 그런 거 쓰지 않고도 법을 잘 지켜왔는데"였다.
그들은 나에게, 몸도 허약하고 노모님도 계시지 않느냐, 잘 생각해보라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특히 병환 중에 계신 어머님을 생각하면, 과연 무엇이 자식의 도리일까 하는 고뇌도 외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나보다 훨씬 가혹한 중형을 받은 '감방 동지'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게 생각해주어서 고맙지만, 쓰지는 못하겠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주석 3)
주석
1> 한승헌, <친구여 그래도 새벽은 온다>, <나의 길 나의 삶>, 319쪽, 동아일보사, 1991.
2> <자서전>, 220쪽.
3> 앞의 책, 228~229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양심 한승헌 변호사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