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공정권의 폭력성은 멈추지 않았(더욱 가혹하게 이어졌)다.
1986년 10월 28일 건국대에서 전국 26개 대학생 2,000여 명이 4일간 철야농성을 하자 1,295명을 구속하고,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분실에서 서울대생 박종철 군을 고문치사했다. 4월 13일에는 전두환이 '호헌조치'를 선언하고, 6월 9일 연대생 이한열 군이 시위 중 최루탄에 맞아 사경에 처했다.
5월 27일 민주당ㆍ신구교ㆍ재야단체 등 발기인 2,191명이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를 발족하고 4.13조치 철회 및 직선제개헌 공동쟁취를 선언했다. 국본은 상임공동대표와 상임집행위원(상집)을 두고, 각 지역마다 지부가 설치되었다. 법조계에서는 정법회(正法會) 회원들을 중심으로 74명의 변호사가 참여하고 한승헌은 상임공동대표, 고영구 변호사가 공동대표, 이상수ㆍ김상철ㆍ박용일 변호사가 상집을 맡았다.
국본을 중심으로 국민살인정권 규탄과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국민대회가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렸다. 국본에 참여한 변호사들은 결행 시각인 6월 10일 서울 세종로 변호사회관에 모여 결의를 다졌다.
상임공동대표인 내가 '왜 우리는 오늘 이 항쟁의 거리에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가'에 대한 참여의 변(辯)을 하고 무리지어 거리로 나섰다. 얼마 못가서 경찰과 부딪힐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우리의 행진은 순조로웠다. 광화문 지하도를 거쳐 조선일보사 앞을 지날 때는 경찰이 우리를 막기는커녕, 길을 열어주기까지 해서 오히려 이상했다. 알고 보니, 멀쩡한 넥타이 신사의 무리가 광화문 쪽에서 오는 것을 보고, 우리를 정부 공직자들로 오인한 듯하였다. (주석 6)
변호사들이 시국문제로 거리시위에 나선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한승헌은 6월민주항쟁에 앞장섰다.
"나는 상임공동대표라는 직함 때문에 부득이 맨 앞장을 서지 않을 수 없었는데, 백골단을 보니 이번엔 당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임진무퇴 외에 달리 퇴로는 없었다. 다행히도(?) 백골단과의 사이에 험악한 충돌은 발생하지 않은 채 해산을 당했다. 시위에 참가한 변호사는 두 번 모두 각 30명쯤이었다고 기억된다." (주석 7)
6월민주항쟁은 노태우의 6.29선언과 직선제개헌 등으로 상당한 성과를 얻었으나, 야권의 분열과 부정선거로 정권교체에 이르지는 못하고 말았다.
6월항쟁이 끝난 뒤 명동 향린교회에서 열린 평가 모임 겸 감사예배에서 한승헌은 말한다. 치과의사들의 참여를 '이를 갈면서'라는 유머로 표현하는 위트를 던졌다.
이번 6월항쟁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은 종전의 데모세력이 아닌 사람들, 가령 의사ㆍ 간호사ㆍ교사ㆍ중소상공인ㆍ샐러리맨 등이 참여하여 그야말로 범국민적인 저항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대구지역 치과의사들이 맨 먼저 참여했습니다.
여러분, 그 이유를 아십니까?
그들은 날마다 이를 갈면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주석 8)
주석
6> <자서전>, 283쪽.
7> 앞의 책, 284~285쪽.
8> 앞의 책, 286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양심 한승헌 변호사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