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2월 18일 제14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오랫동안 민주화운동을 하던 김영삼이 민주자유당(민자당) 후보로 나서 당선되었다. 민자당은 1990년 1월 22일 노태우ㆍ김영삼ㆍ김종필의 3개 정당이 합당하여 만든 보수정당이다. 낙선한 김대중은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박정희의 5.1쿠데타 이후 30여년 만에 문민정부가 들어섰지만, 권력의 중심축은 박정희 - 전두환 - 노태우 정권으로 이어진 인맥이었다. 그럼에도 국민의 문민정부에 대한 기대는 드높았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1993년 8월 13일 서울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김대중선생 생환 20주년 기념모임'이 열렸다. 1973년 도쿄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되어 생환한 지 20년이 되도록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한승헌은 생환기념행사의 준비위원장을 맡았다. 많은 사람이 '생환'과 함께 납치사건의 진상규명을 원하였다. 막판에 갈라섰지만 양김은 오랜 민주화의 동지이고 이제 승자와 패자로 입지가 변하였다. 김영삼 정부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의 진상을 밝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9월 10일 '김대중 선생 납치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의 모임'이 결성되었다.
강원룡(목사)ㆍ박세경 변호사 등이 고문, 강문규ㆍ김상근ㆍ유시춘ㆍ이문영ㆍ지선ㆍ이해동ㆍ하경철ㆍ한영숙ㆍ한정일ㆍ함세웅ㆍ조송현ㆍ이경배 등이 실행위원으로, 한승헌과 가톨릭 여성공동체 회장 윤순녀가 공동대표를 맡았다.
한승헌은 역사의식과 정의감이 남달랐다. 야당 대통령 후보를 정부기관이 납치하고, 한일 양국정부가 정치적 야합으로 사건을 엄폐해온 데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각종 시국사건 변론을 자청한 것도 역사의식과 정의감의 같은 맥락이었다.
한승헌의 글을 읽으면서, 그리고 그의 행동을 보면서 역사의식에 투철한 인물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역사 속에서 바르게 살려는 인간이라면 역사의식이 강할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만, 한승헌은 그것을 글로 증언으로 남기고 후일의 역사발전을 기약하는 초석으로 삼으려는 뜻이 풍기고 있다. (주석 7)
그는 납치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자 동분서주했다. 일본 측 진상조사위원회와 연대하여 활동하고, 국내외의 문헌ㆍ자료ㆍ증언을 수집ㆍ정리한 <김대중 납치사건의 진상>을 간행, 출판기념회를 통해 한일 두 나라 정부에 진상규명을 거듭 촉구했다. 또한 김영삼 정부에 민관합동 조사기구의 구성을, 국회에 국정조사권의 발동 또는 특별조사 기구의 설치를 요구하였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노무현 정부에서 2007년 10월 '국정원 과거사건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이 사건을 조사한 국정원 과거사건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2007년 10월 조사결과 발표에서 이 사건을(박 대통령의) '사전 지시 가능성' 또는 '묵시의 가능성'이란 우회적 표현으로 얼버무렸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범행 지시와 살해 목적의 범행이었음을 인정할 만한 사실을 밝혀놓은 점을 평가하며, 다만 일부 미진한 조사나 우회적인 표현은 이번 조사의 제약과 한계를 드러내는 일면으로 이해하는 수밖에 없다. 이 사건은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국가폭력의 무도함과 진상 은폐, 책임 회피라는 이중, 삼중의 공권력 범죄로서 인혁당 재건위사건과 아울러 박 정권의 최대 오점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주석 8)
주석
7> 최종고, 앞의 책, 95쪽.
8> <자서전>, 315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양심 한승헌 변호사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