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받지 못하는 디지털콘텐츠 창작 노동자
대한민국 법은 근로자에게 다양한 권리를 보장한다. 주 52시간 이상 노동하지 않을 것, 부당하게 차별받거나 해고당하지 않을 것. 그 외에도 근로기준법 안에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보장받아야 할 많고도 당연한 권리들이 담겨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근로자만을 위한 권리라면, 근로자로 인정받지 못한 노동자는 대체 어떻게 보호받아야 할까?
2020년 5월 26일, 국가인권위원회는 '게임업계 페미니즘 사상검증' 관련피해 진정에 대하여 결정문을 냈다. 그 내용을 소개하기에 앞서 페미니즘 사상검증에 관해 간단히 설명하고자 한다.
도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여성 국가대표가 '여대 출신인데다 머리가 짧은 걸 보니 분명히 페미니스트일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페미니스트는 나치와 마찬가지다'라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일부 남성'에게 공격당했던 일은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때 수많은 사람이 그 '일부 남성'을 한심하게 여기던 모습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이전부터 게임업계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페미니즘 사상검증'의 가해자들은 전혀 그런 취급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은 '일부'조차 아니었다. 도쿄 올림픽 때와 다를 바 없이 얼토당토않은 논리로 여성 일러스트레이터들을 해고하라고 언성 높이던 가해자들은 '소비자'로 포장되었고, 회사는 페미니스트로 지목된 작가들과의 계약을 당연하다는 듯이 중단했다. 일이 끊기고 자신의 그림이 잘려 나가는 상황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라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진행되던 그때, 몇 명의 일러스트레이터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넣었다.
긴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2020년 5월 26일이 되어서야 진정인들은 앞서 언급한 그 결정문을 받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문서의 첫머리를 차지한 것은 "이 사건 진정은 각하한다"는 문장이었다. 피해자들이 근로자가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물론 인권위에서 "이 사건 진정의 경우 우리 위원회의 조사대상에 해당되지 않는 등의 이유로 각하하였으나,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차별 대상 중 하나인 여성 프리랜서가 온라인상에서 괴롭힘의 대상이 되고, 다수의 집단행동에 의해 사실상 업계에서 퇴출되어 경제적 불이익을 받고 있는 사건으로서, 언론에서도 수차례 다뤄왔던 심각한 사회문제에 해당된다"는 의견을 표명하고 그것이 이슈화되면서 피해자들의 진정은 헛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근로자로 인정받았다면, 혹은 근로자의 권리가 노동자 전체에게 적용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의문을 지우기는 어려웠다.
건강을 좀먹는 비인간적인 노동환경
작가들이 모이면 자연스럽게 건강 얘기가 나온다. 웹툰 작가 다섯이 모이면 그중 한 명은 암 환자, 라는 말은 디지털콘텐츠 창작 노동자 전반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과도한 노동량이 우리 모두의 건강을 좀먹고 있다.
화장실 갈 시간도 아까워 일에 매달리다 방광염을 얻은 사람, 정신없이 일하다 밤이 되어서야 자신이 온종일 굶었다는 걸 깨닫는 사람, 이틀에 한 번 꼴로 잠을 자는 사람까지. 인간의 3대 욕구가 수면욕·식욕·배설욕이라는데 우리는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욕구조차 살필 겨를이 없다. 이런 심각성은 직군별 질병 경험 비교 조사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휴일이 존재하지 않는 삶
과도한 노동량은 주7일 중 7일 노동을 당연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손꼽아기다리는 연휴에도 연재 위주로 창작 노동을 하는 웹툰·웹소설 작가들의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 나빠지기도 한다. 연휴를 앞두고 사측은 작가들에게 종종 마감을 앞당기길 요구한다. 회사가 쉬어야 하니 그 전에 원고를 검토할 수 있도록 미리 보내달라는 것이다. 애초에 노동량이 과해 제대로 쉬지 못하는 판국에 며칠씩이나 마감이 앞당겨지면 작가들은 결국 잠을 더욱 줄여가며 원고에 매달리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다.
건강을 비롯한 개인 사정을 이유로 휴재를 바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작가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회사에서 휴재를 거절하는 탓에 이를 악물고 작업을 지속하다 쓰러지는 작가들이 부지기수이다. 그렇게 우리는 당사자로서, 혹은 어떤 작가의 팬으로서 다양한 소식을 듣는다.
어떤 작가가 암 투병을 시작했다. 또 다른 작가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또 어딘가의 작가는 손목이 망가져 펜을 들 수 없게 되었다. 그 외에도 여러 나쁜 소식이 끊기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소식들은 대부분 '그런 이유로 해당 작품은 연재를 중단 혹은 무기한 휴재합니다'라는 내용으로 끝나기 때문에, 마치 그 정도의 사정이 아니라면 쉴 수 없다는 경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연재 위주로 활동하지 않는 창작 노동자들이라고 해서 자유롭게 쉴 수 있는 건 아니다. 단행본 위주로 계약하는 웹소설 작가나 대부분의 작업이 외주계약인 일러스트 작가들은 창작물에 대한 턱없이 낮은 단가나 사측이 매기는 비싼 수수료 때문에 결국 투잡과 단일 과노동 사이의 이지선다를 마주한다.
작품을 끝까지 완성하고 나서야 수익금을 받을 수 있는 탓에 연재 계약보다 수입이 더욱 불안정하다는 점도 생계에 큰 위협이 된다. 그리고 그 점은 고스란히 과노동으로 이어져 그들의 건강을 짓밟는다. 어떤 방식으로건 디지털콘텐츠를 창작하는 노동자들에게 쉴 시간은 없는 셈이다.
근로기준법의 목적이 근로자의 기본적 생활을 보장·향상시키며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꾀하기 위함이라면 국가는 노동자 전체의 생활 역시 보장하고 향상시켜야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디지털콘텐츠 창작 노동자를 비롯해 다양한 분야의 노동자를 아예 잊은 것처럼 보인다.
인간은 모두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고, 우리는 그것을 인권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보장할 의무가 있다. 노동형태가 빠르게 변화하는 지금, 인간이 비인간으로 내몰리지 않도록 정부는 노동제도를 시급하게 정비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김효진 여성노조 디지털콘텐츠창작노동자지회 부지회장이 쓴 글입니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에서 발행하는 격월간 <비정규노동> 11,12월호 '특집' 꼭지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