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80년대 이래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기독교계 인사들이 주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신구교가 연대하거나 따로하는 행사에 재야ㆍ문인ㆍ교수 등이 참여하기도 하였다. 독재정권은 이를 가혹하게 탄압하고 투옥을 일삼았다. 각종 시국사건이 일어나고 한승헌은 전담하다시피 이들의 변론을 맡았다. 그리고 그도 어느 순간 크리스천이 되었다.
내가 기독교인이 된 것은 기독교인들을 변호하다가 그들의 올바른 신앙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흔히들 피고인은 변호사를 잘 만나야 한다고 하는데, 변호사는 피고인을 잘 만나야 한다"고.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적지 않은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알았든 몰랐든 하느님의 사랑과 도우심에 의한 것이었음을 뒤늦게나마 깨닫게 되었다. 그 은총에 보답하기 위해서도 하느님과의 수직적인 관계 못지 않게 이 세상 형제들과의 수평적인 관계를 중시해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주석 6)
기독교인들을 변론하면서 그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확고한 사생관, 어떤 박해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세에 경외심을 갖게 되고, 결국 자신도 기독교 신앙을 택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의를 외면하고, 심지어 같은 기독교인들조차도 정교분리를 이유로 유신독재에 눈감는 판국에 일신의 위해와 고난을 무릅쓰고 반대운동에 나선 기독교인들의 용기에 나는 감동했다.
그러다 1970년대 초반부터 수유리에 있는 크리스찬아카데미의 각종 모임에 제법 열심히 나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주워들은 '넌크리스천적인 크리스천', '크리스천적인 넌크리스천'이란 말에 마음이 끌렸다. 꼭 교회에 나가지 않더라도 기독교인답게 살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이었다. (주석 7)
어머니는 기독교인이 아니었고 부인은 기독교인이어서 자칫 고부간의 불화가 염려되었으나 모친이 며느리의 신앙심을 존중하여 기독교에 귀의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어머니의 소속 교회에 온 가족이 함께 다니기로 결정하였다. 담임목사의 증언을 들어보자.
언제부터인가 양광감리교회에 출석하시게 되었고, 이제 우리 교회의 든든한 평신도 지도자로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교인들의 법률적인 문제를 함께 걱정하고 해결해주시는 법률상담자로 매주일 봉사하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너무나도 자랑스럽고 고마운 마음을 가지는 것은 저만이 아닙니다. (주석 8)
그는 서울구치소에 수감되면서 성경을 읽고 9개월 동안 감옥의 독방살이를 하면서 신앙으로서의 기독교와 지식으로서의 기독교를 체득할 수 있었다고 한다. 출감 후 출판사를 할 때 기독교 성직자와 신학자들의 원고를 손질하거나 교정을 보면서 더욱 기독교와 가까워졌다.
한승헌에 관한 본격적인 첫 연구서라 할 수 있는 김인회(인하대 법학전문대 교수)의 <한승헌 변호사의 삶, 균형과 품격>은 그의 '열 가지 균형'의 마지막으로 '세속과 탈속의 균형'을 들었다.
균형의 마지막은 세속과 탈속의 균형이다. 선생의 치열한 삶은 세속에서만 완성된 것이 아니다. 선생의 삶은 세속을 뛰어넘은 탈속의 향기를 진하게 풍긴다. 마치 수행자처럼 세속의 삶을 살다 세속을 초월한 삶을 완성했다. 균형, 중도, 평온은 초월의 의미를 갖는다. 실제로 선생은 세속의 치열한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났고 종교인이 되었다.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하던 기독교인들에게 감화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선생은 말한다. 그렇지만 원래 탈속의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에게서 감화를 받았을 것이다. (주석 9)
주석
6> <자서전>, 385쪽.
7> 앞의 책, 382~383쪽
8> 김기복(목사, 연세대 교목실장), <한승헌 변호사님의 가정과 신앙>, <한 변호사의 초상>, 72~73쪽.
9> 김인회, <한승헌 변호사의 삶, 균형과 품격>, 13쪽, 이지출판, 2021.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양심 한승헌 변호사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